열매가 익는 계절 ‘노년’
열매가 익는 계절 ‘노년’
  • 공옥자
  • 승인 2015.0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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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넘어 느끼는 새해의 기쁨
아직 살아있다는 행복감
가슴 아픈 일 많아도 살려고 한다

그러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씨앗처럼 새로운 탄생의 전환일 수도
축복으로 맞이하는 오늘의 삶

어느새 3월의 대지가 열리고 휘파람새의 노래가 싱그럽다. 2015년, 올 새해는 나에게 특별했었다. 삼십을 넘겼을 즈음에서, 나이를 더해가는 부담과 두려움이 언뜻 언뜻 스쳤는데  웬일로 칠십 후반에서야 새해를 맞는다는 기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아, 해를 넘겨 한 살을 더 보태는 구나!” 혼자 웃었다. 산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라는 걸, 아직 살아있다는 행복감이 밀려왔다. 기대할 만한 것이 없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째서 내가 이리 기쁜 것일까. 속으로 자문하며 칼바람 속에서 열심히 꽃대를 키우는 수선화 가득한 마당가를 몇 번이나 돌았다.

그 동안은 주름 진 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언짢아져서 “죽는 것까진 좋습니다. 늙지만 않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싶어지곤 했는데, 이 가련한 소망엔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었다. 세월이 가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지, 세상엔 쓰리고 가슴 아픈 일이 아무리 많아도 누구나 살려고 애를 쓴다.

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지상을 버리고 캄캄한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해서 죽음엔 눈물과 애통함이 따라 다닌다. 피안의 세계는 알 수 없고 현실은 고통과 슬픔이 길을 막지만 곳곳에 숨겨진 기쁨, 반짝이는 보람 같은 게 삶을 이끌어 모두 열심히 바쁘게 시간을 보낸다.

생자필멸,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명백한 결말을 알면서도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혹 해야 할 숙제를 밀쳐두 듯이 속절없이 세월이 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야 당혹과 절망에 소스라친다.

하지만 잠시 숨 돌리고 생각해 보니 인생의 시작이나 과정은 끝을 위한 것임을 깨우쳤다. 첫 삽을 뜨는 모든 건축물은 완성을 향한 노력이 투입되어 비로소 그 웅장한 모습이 들어나고, 첫 발을 들어 뛰기 시작한 마라토너는 결승을 바라보며 혼신의 힘으로 달려 승리를 얻어낸다.

10달 동안 어미 뱃속에서 오로지 청각만으로 몸 밖 세상을 느끼며 지내던 아기는 양수속의 평안을 버리고 어두운 산도(産道)를 비비며 나올 적에 얼마나 두려울까. 우리는 그 기억을 회상하지 못할 뿐이다. 아기의 탄생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구는 인간 영혼의 성숙을 돕는 또 다른 거대한 자궁은 아닐까.

고단한 노역에서 풀려나는 일용직 근로자처럼 나는 저녁이 되면 늘 가벼워진다. ‘하루가 끝났다!’ 맘속으로 외치며 음악을 듣거나 책장을 넘긴다. 그러던 어느 날 짧은 시 한 줄을 만났었다.

“홍시여 너도 젊었을 적엔 떫은 감이었다네.” 아, 모든 열매는 꽃에게는 노년이구나! 어린 묘목은 짧지 않은 시간을 자라 성목이 되고 꽃이 피고 지며 작디작은 푸른 열매를 단다. 그 무렵엔 어떤 과일도 떫거나 써서 먹을 수가 없다.

나무는 햇살과 비와 바람 병해충 까지 견디며 뿌리와 줄기 잎사귀마다 힘을 다해 충분한 시간동안 공을 쏟고 나서야 열매를 익힌다. 황홀한 색색으로 치장하고 달디 단 과즙을 채워 모든 동물의 먹이가 되는 것이다.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아메바면 어떻고 진흙이면 어떤가. 인류의 출현과 진화는 분명히 기적적이다. 그 아득한 삶의 시원에는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었으리라. 온갖 생명들의 생성과 소멸의 순환 과정을 살피면 사유의 지평은 끝없이 열린다. 죽음이란 생의 끝이 분명하지만 하나의 열매가 과육을 털어내고 씨앗을 남기듯 육체를 버리고 떠나야 하는 새로운 탄생으로의 전환일 듯싶다.

내 삶의 지난 자취 속에 영광은 없었다. 마치 먹기 거북한 땡감처럼 떫었으리라. 세월의 풍파를 겪어 낸 노년에서 비로소 한 알의 과일처럼 익어 가는 내 날들을 축복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축복인 듯 맞이하는 삶을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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