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한 ‘또다른’ 가족
피보다 진한 ‘또다른’ 가족
  • 안혜경
  • 승인 2015.0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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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최정숙 제주도교육감
가톨릭교인으로 평생 독신의 삶
독립운동 및 여성교육에도 헌신

친할머니 아닌 ‘우리 할머니’
아버지와 영적 모자지간 약속
달라지는 ‘가족의 의미’


며칠 전 할머니 제사를 지냈다. 우리 부모님과 형제들은 내가 8살이 될 때까지 ‘안팎거리’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우리 집은 관덕정 근처 시내 중심에 있었지만, 돼지가 있던 ‘통시’, 온돌을 때는 ‘굴묵’과 헛간, 닭과 오리가 종종대던 마당, 옥수수가 자라던 텃밭, ‘밖거리’ 앞의 앵두나무의 투명하고 빨갛던 열매에 철따라 피는 꽃들도 같이 살았다.

성당이 지척이라 하루에 3번씩 울리는 종소리에 그 때마다 할머니는 우리를 불러 모아 기도드렸고 나는 종종 새벽미사도 따라 나섰다. 마농꽃(흰샤프란)이 대문과 집을 쭉 연결했고 나무 밑 맥문동의 무성한 잎들과 보라색 꽃, 지붕 높이만큼이나 큰 우산모양의 해동나무와 그 아래에서의 소꿉놀이, 할머니와 함께 먹던 찐 감자며 당시엔 귀했던 할머니와 손님이 마시던 홍차…. 이 아스라한 어릴 적 기억엔 늘 할머니가 함께 있다.

부모님이 분가한 이후에도 골목 둘을 지나 지척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나와 오빠는 늘 살다시피 했다. 새로 지은 우리 집은 당시 드물게 석유보일러 욕실이 있어 공중탕을 꺼리던 할머니도 1주일에 한번 씩은 우리 집에서 함께 목욕을 했다. 할머니를 뺀 가족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지 할머니와 우리 관계에 설명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신성학원 1회 입학생이었던 할머니는 학구열에 불타 증조할아버지를 끈질기게 설득해 서울에 있는 진명여학교에 입학했다. 그 때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일경에 잡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과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뒤늦게 의대에 진학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을 개업했고, 신성학원 무급교장으로 근무하며 여성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1964년 초대 제주도교육감(최정숙·1902~1977)까지 지내셨으니 지금 생각해도 여성으로서 놀라운 삶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가톨릭 교인으로서 평생 독신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의지하며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고 어려서부터 맹세했다. 그 신념을 지켜냈으니 평생 독신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생모인 친할머니와 할머니는 친척 관계였고, 친할아버지 역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에 교감선생으로 할머니와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함께 종교 활동을 헌신적으로 했다. 후에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친할머니가 자식들을 데리고 광주로 이사 가는 바람에 당시 제주농업학교를 다니던 아버지가 제주에 홀로 남겨지게 되어, 더욱 할머니와 가까운 사이로 왕래하며 지내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각자 홀로 살던 두 분은 서로 의지하며 가족으로 살자고 약속하고 법적인 관계를 떠나 영적 모자지간을 이루게 됐다. 두 분은 애정이 깊은 모자지간이었고, 아버지가 결혼하고 우리들이 태어나자 할머니는 당신이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걸 우리에게 숨겼다. 할머니 옆에 앉아 물어볼 때 마다 내게 들려준 ‘가마타고 할아버지와 결혼했다던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였던 것이다. 우리는 물론 할머니가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변함없이 한 가족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리 가족은 모두 무척 그리워하였고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누었다. 몸소 실천해 보이셨던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헌신적 삶 청빈함을 비록 잘 따르지는 못했으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늘 본받아야 할 삶의 태도로 마음에 새기고 있다. 피는 안 섞였지만 우리는 끈끈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이어진 관계였다.

최근 드라마와 영화에서 말하는 가족의 의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법적 테두리 혹은 혈연의 범위를 벗어나 광범위해졌다. 사회의 구성원이 다양해졌고 결혼제도는 현실 속에서 약화되고 있다. 당연시했던 가족의 범주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뿐만 아니라 법적 제도에도 변화가 필요하게 됐다. 피보다 진한 사랑과 존경의 관계로 태어난 가족, 그래도 할머니를 우리 할머니라 부를 때 마다 그 관계를 설명해야 할 것 같은 불편함을 느낀다. 그게 언제면 사라질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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