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民 정신으로 사재 털어 암벽 부숴 길을 내다
愛民 정신으로 사재 털어 암벽 부숴 길을 내다
  • 박수진 기자
  • 승인 2015.0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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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따라 이야기따라
⑧건들개 주민 위해 만든 ‘공덕길’

‘김만덕기념관’이 위치한 제주시 건입동. 이제 이 곳은 ‘건입동’대신 ‘만덕로’와 ‘사라봉길’, ‘동문로’등의 새로운 도로명주소로 불린다.

현재 건입동 주민센터를 가기 직전 ‘행복나눔지역아동센터’가 보이는 곳으로 좌회전을 하면 ‘공덕길’이라는 도로명 주소 안내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안내판을 따라 1분정도 쭉 걷다보면 제주지방기상청과 트멍갤러리 등이 보인다. 바로 맞은편에는 가파른 계단이 보이는데, 이 곳을 바로 ‘공덕동산’이라 부른다. 공덕동산이 속해 있는 ‘공덕길’의 구간은 제주시 건입동 1188번지에서부터 1226-3번에 해당한다. 만덕로와 동문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300m도 채 되지 않은 이 좁은 길에 무슨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까.

▲ 공덕길은 고서흥이 건입동 주민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 만들 길로 구간은 제주시 건입동 1188번지에서 1226-3번지에 해당되는 곳이다. 사진은 공덕길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공덕동산.

▲고서흥, 주민 안전 위해 발벗고 나서다

공덕동산이 있기 전까지 이 곳은 가파른 바위언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곳에 살았던 건들개(健入浦, 건입동의 옛 이름)주민들은 제주성의 동문 밖으로 통과하려면 북문과 동문을 거쳐야 했으므로 아주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바위언덕을 타고 넘어 다녔는데, 자칫하다가는 큰 일이 벌어지고 밤에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단다.

인명사고가 연이어 벌어지자 상부에서는 이 인근의 길을 내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따라 건들개 주민들은 마을회의를 소집하고 비용을 각자 부담하기로 했지만, 날이 지날수록 협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작년(1876년)에 흉년이 들어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어렵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고서흥(1823~1899)은 집안형편이 넉넉하지 않지 않았지만 주민들을 위해 먼저 발 벗고 나섰다. 고서흥은 고심 끝에 “내가 이들보다는 형편이 조금 낫지 않은가?”라며 일 년 내내 농사지은 조 300석을 내놓았다고 한다. 고서흥은 일할 인부를 모아 공사에 착수했지만, 암반을 부숴 길을 뚫어야 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난관에 봉착했다.  하지만 고서흥은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험난했던 길을 평지로 만든것 으로 알려졌다. 이때가 고종 14년인 1877년 2월이다.

▲ 건들개 주민들이 고서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 이 비는 1991년 건입동 주민센터와 그의 후손들에 의해 재정비됐다. 공덕비에는 “고서흥이 자신의 재산을 출연해 벼랑을 깎아 길을 내었다”라고 적혀 있다.

▲건들개 주민들, 고서흥 기리기 위해 ‘공덕비’세워

건들개 주민들은 고서흥의 공적을 알리기 위해 상부에 등장(1877)을 올렸다.

“길을 평평하게 닦고자 하는 뜻이 있었지만 여태까지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서흥은 스스로 석공과 인부들의 양식으로 쓸 쌀과 공사비용을 마련, 석고과 일할 인부를 불러 모아 높은 곳은 메우고 낮은 곳은 채우면서 저 험난했던 길을 평지로 만드는데 보름도 안 걸렸습니다.(중략)”

상부는 고서흥에게 포상을 하기로 했지만, 그는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건들개 주민들은 이곳에 고서흥의 공덕(功德)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으며, 이때부터 이 곳 지명이 공덕동산이라고 불리고 있다.

제주시 건입동주민센터와 고서흥의 후손들은 1991년 공덕비를 재정비한다. 일부 사람들이 공덕비 주변에 쓰레기 등을 버린데 따른 것이다. 공덕비에는 ‘高瑞興(고서흥)’·‘捐出私財(연출사재, 자신의 재산을 출연해)’·‘攻石治路(공석치로, 벼랑을 깎아 길을 내었다)’라는 내용과 등장(等狀)의 원본이 새겨져있다.

▲이후 어떤일이 있었나

고서흥이 사망하고 6년 뒤인 1905년. 조선 고종 때 김옥균을 암살했던 제주목사 홍종우는 이 인근에 정자인 영은정(泳恩亭)을 지었다. 하지만 영은정은 일제강점기 때 훼철됐으며, 사법(司法) 홍진국(洪鎭菊)이 쓴 ‘영은정기(泳恩亭記)’만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영은정기에는 ‘내가 홍종우와 함께 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산에 올라가 물이 있는 곳에 가보니, 돌부리가 뾰족하고 나무 뿌리가 얼키고 설켜 한 자리도 평평한 곳이 없었다.(중략)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데도 아직 쉴 만한 장소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정자 하나를 짓는 것이 더 낫겠다’라고 기술돼 있다. 이 때문에 홍종우가 이 곳에 ‘영은정’을 세운 것으로 예상된다. 영은정이 있던 곳에는 현재 김만덕기념관이 자리 잡았다.

1927년에는 공덕동산 일대에 큰 홍수가 났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현재 건입동주민센터가 있는 위쪽으로 피난 갔는데, 다음날에 와보니 ‘홍수’로 인해 집이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해 산지천도 매몰됐다. 원래 물은 김만덕 객주터가 있던곳으로 흘렀는데, 홍수로 인해 지금의 형태로 공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덕동산 거닐면 할아버지 자취 느껴져”

고서흥의 고손자이자 제주고씨종문회총본부 회장인 고시홍씨(사진)는 “할아버지의 업적은 1983년 발간된 ‘성주지’창간호에 잘 나와있다”며 “이번 보도를 계기로 할아버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겠다”고 말했다.

고씨는 이어 “공덕동산은 옛 제주시 건입동의 역사를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며 “가끔 이 곳을 거닐면 할아버지의 자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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