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오랜만에 백설기 같은 하얀 눈이 내렸다. 한라산은 온통 눈밭인 설국(雪國)으로 변했다. 비록 빙판으로 운전에 애를 먹고 길이 질퍽거려 다소 짜증스럽긴 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잠시나마 덮어준다는 점에서 가끔은 눈이 내렸으면 한다.
지난해 초 한국에서 개봉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겨울 왕국’은 미국 월트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 영화다. 외화(外畵)로는 사상 두 번째로 1천만 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야기의 구성은 많이 다르지만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이 바로 이 영화의 모티브다.
안데르센은 어릴 적 우리들의 ‘추억 창고’였다. 선악(善惡)의 기로에서 발버둥치는 소년 카이(Kay)와 게르다(Gerda, 겔다)란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눈의 여왕’도 그 중 하나다.
어느 날 모든 것을 추하게 보이게 하는 ‘마법(魔法)의 거울’ 파편이 하늘에서 떨어져 카이의 눈과 심장에 박히면서 그의 성격은 변하고 만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눈의 여왕’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동화는 카이를 찾아 나선 게르다의 모험담으로 전개된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얼어붙은 강에 홀로 서 있는 카이를 본 게르다는 그를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은 카이의 심장에 박혀 있던 거울 파편을 녹였고, 감정을 되찾은 카이가 눈물을 흘리자 눈에 박혔던 거울 조각 역시 빠져나가며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동화는 우리가 길을 잃었을 때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은 바로 믿음과 사랑임을 일깨워 준다.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과 함께….
카이와 게르다는 영화 ‘겨울 왕국’에서 아란델이라는 왕국을 통치하는 여왕 엘사와 동생인 안나로 등장한다.
엘사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거나 눈을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남몰래 지닌 비밀이기에 그는 늘 혼자였고 외로웠다. 여왕이 되는 날, 엘사는 동생과 의견 차이로 다툼을 벌이다 그 능력을 들키고 만다. 이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운 엘사가 아란델을 떠나자 왕국의 여름이 사라지고 겨울만 남게 된다.
동생 안나는 사랑하는 언니와 왕국의 여름을 되살리기 위해 엘사를 찾아 나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안나는 언니를 찾아내고 결국 엘사는 가족과 백성의 품으로 돌아온다. 왕국을 뒤덮었던 겨울도 감쪽같이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제목이 그래서인지 영화를 본 필자의 뇌리 속엔 ‘얼어붙은 왕국’의 이미지만 박혔던 기억이 난다. 마치 우리 사회 전반의 자화상(自畵像)을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청와대 구중궁궐의 박 대통령은 어쩌면 영화 속 엘사를 닮았다.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잇는지 몰라도 우리들 눈엔 늘 외롭고 쓸쓸하게 비친다. 탁 터놓고 이야기해도 좋으련만 여태 그런 기미는 없다. 궁궐 밖 거센 외침에도 ‘문고리 3인방’ 등을 감싸고 돌기 일쑤다. 그 사이 백성들은 점점 멀어져 가는데도….
당리당략과 이전투구(泥田鬪狗)로 날을 새는 정치권도 예나 다르지 않다. 최근 들어 새 지도부 구성을 마친 여야 정치권 모두 화합 분위기보다는 자신들의 입지를 드러내기 위해 각(角)을 세우기에 여념이 없다. 걸핏하면 민생을 부르짖으면서도 백성들의 생활고나 안위(安慰)는 관심 밖이다.
지방정치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난 연말 대규모 삭감 사태를 부른 집행부와 도의회간 ‘예산 싸움’은 평행선을 달리며 현재도 진행형이다. 먼저 양보하는 쪽이 결국 승자가 될 것이라는 누차의 조언도 이들에겐 ‘쇠귀에 경 읽기’다. 칼바람 불던 날 생존권을 외치던 강정마을 사람들마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내팽개친 이들에게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있으랴.
안데르센 동화 속 카이처럼 우리 모두에겐 ‘마법 거울’의 파편(破片)이 하나씩은 박혀 있을 터다. 다만 게르다처럼 진정성 어린 용기와 믿음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 없을 뿐이다. 백성들을 위해 얼어붙은 겨울왕국을 되살리려는 ‘안나’도 없기는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