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고향은 제주도다. 제주도에서도 제주시에서 자랐다. 지금은 원도심이라고 부르지만 내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던 당시 제주시에는 신제주가 없었다. 그냥 제주시였다. 동문로터리․동문시장․산지천․제주항․칠성로․관덕정․무근성․남문로 등 지금의 중장년 세대에게 원도심 일대는 일상의 공간이자 놀이터였다.
1960년대 동문시장 뒷편 동산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집에 수도가 설치되지 않아서 물허벅을 지고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아오곤 했다. 어머니들은 어부들이 밤새 작업하여 가져온 싱싱한 생선을 항구의 어물시장에서 사와서 아침 밥상에 올렸다.
육지로 출타 또는 진학하려는 사람들, 수학여행 가거나 귀향객을 마중하는 사람들로 제주항은 늘 북적였다. 매립되기 전 탑동의 ‘먹돌’ 바닷가는 어린이들에게 훌륭한 간식거리를 제공했다. 먹을 것이 너무나 귀했던 시절 돌틈에서 잡아서 양은주전자에 끓여 먹던 ‘깅이와 보말’은 그야말로 별미였다.
용연은 어린이들의 담력시험장이었다. 높은 곳에서 겁 없이, 아니 겁이 나도 친구들로부터 ‘겁쟁이’라는 놀림이 더욱 싫어서 물로 뛰어들기를 반복하던 어린이들. 피부가 까맣게 타다 벗겨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중․고교 시절을 보낸 사람들치고 칠성로와 관덕정 일대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주시청 등 관청․맞춤양장점․다방․영화관․빵집․서점․금은방과 문방구 등 입고 먹고 즐길 것들로 가득했던 활기 넘치는 공간이었다. 당시 어른들에게 칠성로의 다방은 사교의 장이자 예술가들의 갤러리였다. 멋쟁이들이 활보하던 칠성로는 문화와 예술의 첨단을 보여주던 전시장이나 다름없었다.
동문시장 일대는 제주시민에게 일상의 에너지를 공급해주던 장소였다. 조랑말이 끄는 마차에 물건을 싣고 배달하던 마부들, 동문로터리 울보아저씨, 오벨리스크 앞 사진 촬영, 화교 빵집, 울고 웃으면서 여가와 위안의 시간을 가졌던 동양극장, 우주인이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딛던 순간을 시장 상인들이 함께 모여 TV로 시청했던 전파사, 레버를 빙빙 돌려 교환원을 불러 통화하던 전화기, 전당포와 포목점들, 스테인리스 그릇가게의 화려한 반짝임 등, 그립다 못해 시간을 거슬러갈 수만 있다면 현재의 시간을 기꺼이 담보해주고 싶을 정도다.
제주시를 넘어 제주지역 대형공연장으로 자리매김했던 시민회관은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과 흥분을 가져다주곤 했다. 고 추송웅 선생의 일인극 ‘빨간 피터의 고백’이 제주를 찾아와서 던진 문화충격, 한국의 내로라하는 성악가들이 초대되어 오케스트라 반주로 가곡들을 들려줬을 때의 황홀함이 각인되어 있다. 제주도를 대표하는 브라스밴드의 공연은 오빠부대들을 몰고 왔고 그 무대에 섰던 적지 않은 음악인들이 현재 제주 관악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추억은 있기 마련이다. 그 추억은 정확하기도 하고 윤색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지만 힘이 세다. 시간의 흐름 속에 남아있거나 혹은 없어져버린 공간에 대한 기억은 삶의 고통과 갈증을 위안해주고 해소해주던 우리의 오아시스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힘들게 살아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돌아오라, 과거의 제주시 원도심 어린이들이여. 어린동생 업고 손잡고 깔깔대면서 친구들과 구슬치기, 딱지치기, 말타기, 줄넘기하던 골목길을 다시 찾아가보자. 할머니와 할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의 현장을 다시 만나보자.
기억의 편린들을 함께 맞춰보면서 추억의 모자이크를 함께 완성해가면서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만들어보자. 잘 살아왔다고 서로 토닥여주고 그 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주시 원도심 구석구석을 천천히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