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창간과 함께 30년 가까이 몸담았던 한라일보를 떠나며 그룹웨어에 남긴 말이다. 사실 이 구절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낙화(落花)’ 중 일부다. 어느 정치인이 자신의 처지를 빗대 인용함으로써 한 때 인구에 회자(膾炙)되기도 했다.
‘낙화’는 이렇게 전개된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시는 계속 이어진다.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2015년 새해 아침은 을씨년스러웠다. 그렇다고 어떤 미련이나 회한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상실감’ 같은 류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마음의 평정(平靜)을 되찾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꽃’이 지는 것은 ‘바람’ 탓이 아니라, 때가 되면 시들고 떨어지는 게 ‘꽃의 운명’인 것을. 세상사가 다 그렇듯이 절정의 한 때를 보낸 것들은 언젠가는 내리막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理致)임을 알고 있기에…. 그래도 마음 한 켠은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다’던 시인의 심정과 맞닿아 있었다. 조지훈의 ‘낙화’가 새해 벽두에 불현듯 떠오른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지훈의 ‘낙화’만 있는 게 아니라 이형기의 ‘낙화’도 있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落花)…/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다. 그렇다고 서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꽃이 떨어져 거름이 되어야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다.
낙엽도 마찬가지다. 나무는 낡은 잎사귀를 떨구어내 그 자양분(滋養分)으로 자신을 움추려 겨울을 나고 다시 새 생명의 싹을 틔워나간다. 낙화나 낙엽 모두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최근 단행된 제주자치도 인사에서도 이름 있는 꽃들이 대거 ‘낙화’했다. 이번 인사를 통해 일선에서 물러난 고경실 도의회 사무처장이나 박영부 기획조정실장 등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라성(綺羅星)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세월의 무정함을 비켜가진 못했다. 누구 탓이라기보다 그만큼 시간이 흐른 셈이다.
떠나는 사람의 ‘슬픔’은 남아 있는 자의 ‘기쁨’으로 윤회(輪廻)된다. 하지만 그 기쁨이 슬픔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고,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기에 슬픔이나 기쁨을 서로 공유할 줄 아는 슬기를 배우고 지녀야 한다.
시인은 말했다. 무성한 녹음과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고.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고…. 떠나는, 떠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고 싶은 헌사(獻辭)다.
‘살아있는 것은 흔들린다’고 설파한 이는 오규원 시인이었다.
“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중략>/피하지 말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한라일보를 떠나 오며 독자들에게 아무런 안부도 전하지 못했다. 그동안 보내주신 성원과 격려, 질책 모두에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일주일 전 ‘제주매일’에 새 둥지를 틀었다. 낯설음도 있지만 또 다른 셀레임도 안겨준다. ‘낙화’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이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려고 한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