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삿날 할아버지에게 쓰는 편지
공연연출가 이종일
제사도 독특한 한국문화
여러 세대가 공유해야할 ‘가치’
방식?음식 현대와 차이
“유세차” 축문 대신 편지로
음식도 아이들이 좋아할 것으로
이왕 지낼 것 ‘공감 제사’ 제안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는 민서에요. 저는 할아버지를 뵌 적은 없어요. 그렇지만 좋은 분이셨을 것 같아요. 저희는 잘 지내요 상열이 오빠가 대학교에 들어가요. 할머니는 다리가 아파서 걷기가 불편하세요. 할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잘 계시죠? 안녕히 계세요.”
얼마 전 있었던 아버지 제사 때 막내 외조카가 축문 대신 쓴 편지다. 외조카 민서는 초등학교 1학년이다. 그 애가 여동생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한국 문화’ 하면 김치에서 한류까지 저마다 몇 가지씩은 댈 수 있을 테지만, 제사 문화를 그 목록에서 빼놓지 않는 사람도 많을 터이다. 정성껏 마련한 제사상에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면서 돌아간 조상님, 피붙이를 기리는 기일 제사는 오늘도 누군가 지내고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제사는 몹시 기대되는 밤이었다. 평소 먹지 못했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1일 년 중에 드문 날이었다. 오랜만에 뵈는 삼촌들로부터 용돈도 기대되는 날이기도 했다. 늦은 밤까지 졸음을 참아가며 버티던 동생은 결국 잠들어 아침에 울고불고 하곤 했다. 어른들은 오랜만에 모여 음복을 하며 밤새워 이야기꽃을 피웠다.
장남인 필자는 동생?조카들과 모여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아버지 제사를 지내오면서 느끼게 된 것이 있다면, 제사도 여러 세대가 공유해야 할 문화라고 할 때 요즘 아이들이 쉽사리 이해하거나 달가워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왕 지내는 제사라면 모두가 향유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아이들도 참여 할 수 있는 제사를 고민하다 몇 가지를 바꿨다. 우선 “유세차 ~” 로 시작되는 고색창연한 축문 대신 편지를 쓰게 했다. 처음엔 장손인 아들이 주로 썼지만, 거듭될수록 아이들 사이에 ‘즐거운 경쟁’이 돼가면서 막내조카에게까지 순서가 온 것이다. 편지 축문은 예상외로 큰 효과를 보고 있다. 아이들은 적극적인 참여로 가치와 의미를 배우고 어른들 또한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감동을 받는다.
음식에 변화도 필요하다. 전통적인 제사음식은 현대의 입맛과 동떨어진 것들이 있다. 그래서 평소 고인이 좋아했던 먹거리와 아이들의 기대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의 대체가 현실적이지 않나 생각한다. 제삿날 모인 후손들이 음식을 맛있게 즐기면서 먹는다면 부친 또한 쾌히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적어도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들에서 지내는 제사의 원조는 단연 공자라고 할 수 있겠다. ‘원조’이니만큼 공자 시대에는 모든 게 엄격한 법식에 따라 이뤄지지 않았을까 언뜻 생각되지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지금과 비슷한 갈등 또한 있었다.
‘논어’를 보면 재여(宰予)라는 사람과 공자가 조상을 모시는 문제로 입씨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재여는 요컨대 “3년 상이라뇨? 1년도 깁니다. 3년 동안 공부 안하면 공부도 망하고, 3년 동안 음악을 안하면 음악도 망 합니다”라고 한다.
공자는 요컨대 “너, 부모님한테 3년만 사랑받았니? 아니잖아. 그러면서 3년이 길다고 하니? 그런 부모님 사랑을 알면서도 상중에 쌀밥이 넘어가고 비단옷이 입어지니?”라고 한다.
공자는 ‘논어’의 다른 대목에선 “상을 형식적으로 잘 치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장례나 제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고인을 사모하는 정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 고인과의 따뜻한 정서적 교감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가지 노부유키라는 일본 학자는 죽은 조상을 모시는 행위에 대해 “현재를 영원히 자각하는 것”이고 “죽음을 보는 눈이 삶을 보는 눈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조상을 잘 모시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종교적 입장과 사상의 자유를 존중한다. 그러나 이왕 제사를 지낸다면 온 가족이 효율적인 공감을 형성하는 방안이 어떨까 한다.
곧 설날이 온다. 가족이 모여 차례를 지낼 것이다. 이번에는 아이들 대신 아들인 내가 ‘축문 편지'를 써야겠다. “아버지 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