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이 가출한 이유
홍길동이 가출한 이유
  • 강성분
  • 승인 2015.0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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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들 지배장치 '희생양'
갑질 '정당성' 오랜 시간 쌓여와
원초적 시작은 가정일지도

분노에 자기 몸에 불을 지른 '을'
수직으로 서있는 사회의 병폐
'을'을 위한 '초능력'은 어디?

 

요즘 ‘갑질’에 대한 논란이 시끄럽다. 필자 역시 갑(甲)질을 향한 을(乙)들의 분노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아무 해결책도 없이 분노할 거리를 찾아다니는 혹은 부추기는 현실을 보자니 석연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금방 잊어버리는 분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또 다른 분노로 대체되다가 내 몸의 암 덩어리만 될 뿐이다. 좀 엉뚱하겠지만 홍길동전을 통해 작금의 갑질에 대한 논란과 기원을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해 훌쩍훌쩍 눈물 콧물 찍어 대던 홍길동은 급기야 그 원통함을 아뢰며 가출을 해버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했으니 원인은 아버지의 갑질에 있었다고 해도 될까?

여기에 본처 소생 형제의 갑질이 더해졌다. 그러면 가족의 갑질이 본질인가? 그렇게 몰아붙이면 홍길동의 아버지와 형은 억울하다고 느낄 것이다. 가족을 등지게 할 정도의 갑질이 가능하게 한 것은 당시의 사회제도였다고 변명할 것이다.

조선의 처첩제를 이름이다. 아버지가 정승판서라도 어머니의 신분이 천하면 천민이고 서자였다. 이는 양반들이 첩은 거느리되 양반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첩의 자식들이 집안의 재산싸움에 끼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권력과 부는 자식도 몰라보는 법, 조선은 예의와 도리를 엄격히 따지는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았지만 양반들은 자신들의 영리에 맞는 제도를 만들어 그 뒤에 숨었다. 그렇게 갑들은 천륜마저 저버리기를 마지않았고 태생부터 억울했을 수많은 을들은 평생을 열등감에 시달렸다.

이렇게 만들어진 갑들의 지배장치가 어디 이뿐이랴. 갑질의 ‘정당성’은 오랜 시간 권력과 부와 종교와 관습을 통해 차곡차곡 쌓여왔다. 아마도 그 원초적인 시작은 가정일지도 모른다. 굳이 제도가 아니어도 가정 내에서 갑질은 존재하고 우리들 심리와 행동양식에 체득됨을 부인할 수 없다.

나부터도 두 아들에게 엄마라는 이유로 수많은 갑질을 해댄다. 내 아들들은 을의 위치에서 할 수 없이 고집을 꺾기도하고 벌을 받지 않기 위해 마음에 없는 사과를 하며 을의 행동양식을 답습해 간다. 학교에 다니면 선생님 혹은 선배들의 갑질에 순응하는 법을 배울 것이며 군대에 가서는 하루 먼저 들어간 선임병의 군화를 무릎 꿇고 닦게 될 것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을의 위치를 각인한 아들은 이후 닥치는 세상의 부당한 대우를 당연시 여길 것이다.

홍길동은 그나마 신통방통한 초능력이라도 있었기에 구름을 타고 집을 떠나 율도국을 세우고 마침내 진정한 갑이 되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호기롭게 대문을 박차고 나갔다가도 기생집에서 술 한잔 하다 소쩍새가 울기도 전에 돌아왔을 것이다.

초능력이 없는 대한민국의 을들은 비행기를 돌리고, 뺨을 내주고, ‘조인트 까이’는 것도 모자라 상한 음식을 던져 주어도 분노의 표시로 갑이 아닌 제 몸에 불을 질러야했다. 게다가 이 사회가 수직으로 서있는 이상 갑은 또 그 위의 갑에게 기꺼이 비굴한 을의 행세를 한다. 맹인들의 나라에서는 애꾸가 왕이니 눈을 뜨지 않으면 애꾸에게 끌려 다니고 두들겨 맞아도 피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을은 부당한 갑질에 저항하는 대신 자신도 갑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어느 을에게 갑질을 행사할 수 있기를 꿈꾼다. 이것이 갑의 동력이다.

그렇다면 을을 위한 초능력은 정말 없을까? 을의 연대와 협력이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너무도 쉽게 갑의 농간에 무너짐을 역사가 보여주었다. 을의 연대 역시 수직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근본으로 돌아간다. 내 가정에서 갑질과 훈육을 혼돈하지 않고 질서와 안녕에 공존할 궁리에 빠진다. 나와 내 아이들이 수직의 세상을 무너뜨리지 못해도 기꺼이 즐겁게 살아내기를, 그래서 조금 다른 길을 택했을 때 세상의 냉랭한 조롱에도 굳건히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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