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벌써 한해가 지나가버린다. 방송에선 언제나 그렇듯 한해를 마감하며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 ‘다사다난(多事多難)’ 그렇다. 지난해에도,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그러했듯이 올해도 ‘다사다난’ 하단다.
인생사가 그런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일들을 하며 과정과 결과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니 그러한 것이다.
올해 개인적으로도 많은 일들과 생각으로 점철된 한해였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한중FTA 타결이다. 설마, 설마 했었는데.
이젠 한중FTA가 타결돼 버렸기에 “과연 농업에 희망이 있을까?”라는 절실한 물음을 던져본다. 많은 농업인들도 그렇지만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갈등을 하는 계기가 됐다.
중국과 FTA가 체결되면 새로운 기회가 생긴다고도 한다. 물론 틀리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한쪽에서 얻으면 또 다른 한쪽에서 잃는 게 세상 이치다. 얻는 쪽은 어떤 곳이며, 잃는 쪽은 어떤 곳일까?
얻는 쪽은 잘 모르겠으나, 잃는 쪽은 분명 농업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고품질 농산물을 생산한다면 수출도 할 수 있고, 틈새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니 기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 “농산물 수출의 이익과 틈새시장 공략의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답은 별로다. 농산물 수출은 보조금이 없다면 할 수 있는 업체도 없거니와 수출을 할수록 우리의 세금으로 적자폭을 메우는 기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틈새시장은 말 그대로 전체시장에서 차지하는 규모가 극히 미미해서 산업으로 발전시키기에 더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한중FTA와 관련, 많은 제안과 계획을 세우고 발표를 한다. 하지만 “과연 대다수의 농민들이 공감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는 것 같다. 단지 보조금을 통한 달래기에만 급급한 것 같다.
과연 언제까지 그런 보조금으로 농업을 실천할 수 있을까.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자생력을 갖출 시간은 버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농업이 왜 필요하며,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홍보를 통한 사회운동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 먹을거리,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먹을거리,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식욕이다. 먹지 않고서는 살수가 없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떻게 먹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을 지켜갈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농민들은 생존권이 걸린 문제이다. 남들의 얘기가 아니다.
거창하게 우리 농민들을 이해해달라고는 않는다. 다만, 바로 우리의 형과 누이 그리고 부모님과 삼촌들을 좀 더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이러한 경우가 어디 농민뿐이겠는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아직도 ‘갑’에 의한 ‘갑’을 위한 ‘갑’의 목소리에 묻혀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같이 연대해 행동하지 못할지라도, 최소한의 공감 내지 관심 표명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나의 일이 될 수 있기에 최소한 공감은 해줘야 한다.
끝으로 나치에 반대한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oller, 1892~1984) 목사의 ‘그들이 왔다(First they came)’라는 시를 소개한다.
나치는 먼저 공산당을 숙청했다./난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태인을 숙청했다./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조원을 숙청했다./나는 노조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카톨릭교도들을 숙청했다./나는 개신교였으므로 침묵했다.
지금 바로 전화기 버튼을 누르자. 잦은 비 날씨로 아직도 감귤을 다 수확 못한 우리의 형과 누이, 그리고 삼촌들께 “이번 휴일엔 꼭 가서 도와드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