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아침이다. 온 세상이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듯싶다. 교회뿐 아니라 이름 있는 건물마다 화려한 트리가 장식되고 거리에는 호화로운 축하 불빛이 현란하다.
이렇게 축하로 들썩이는 12월25일, 그러나 성서에는 오늘이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라는 기록은 없다. 양치는 목자가 들에서 잠을 자던 그 밤이 언제였는지 계절이나 날짜가 없는 것이다.
없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다. 이 지구에 오시고, 고난의 생애를 살며 아무도 할 수 없었던 말씀을 하셨고 아무도 하지 못했던 죽음과 부활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신 그 분의 탄신을 축하한다는 건 매우 합당하고 의미 있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탄신기념일인 크리스마스는 그 분의 사후 300여년이 지난 시점에 정해졌다. 서기 337년 제35대 교황에 즉위한 율리오1세(Julius I)가 12월 25일로 탄생일을 기념하자고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정해진 탄신일이라 해서 이 날의 축하행사가 퇴색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 날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어쩌면 1년을 하루같이 탄생을 축하하고 앙모하도록 숨기신 하늘의 뜻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반짝 하루를 정해 선물을 나누고 기쁨으로 인사를 건네고 마는 그렇게 가벼운 날이어서는 안 될 것임으로.
신앙이란 생의 매 순간을 성찰해 그 가르침을 묵상하고 그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허사일 것이다.
인간의 위선과 허위를 천둥처럼 꾸짖으며 불의와 오만을 쪼개어 밟으신 예수님의 생애는 긴 세월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도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가난하고 병든 자의 편에 계셨고 약한 자와 죄인을 친구로 삼으셨던 예수님은 육체를 넘어 영혼까지를 구원하고자 십자가를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이 아침에 나는 “한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신 그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리고 영혼, 막연하지만 육체 속에 있는 비물질적인 어떤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대체 영혼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임종 직전의 환자의 몸무게와 사망 직후의 몸무게를 측정해서 대략 21g의 차이를 알아 낸 미국과 스웨덴의 의사는 영혼의 무게가 21g이라고 발표 했으니 영혼도 물질일까 싶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영혼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 누가 딱 부러지게 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과 달라 육체뿐 아니라 정신이라고 불리는 어떤 능력을 지닌 존재임에 무게를 둘 때 흐릿하게나마 영혼을 감지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누구나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이나 인품의 경중을 곧바로 눈치 챈다. 얼굴에서 오는 첫인상은 물론이고 말투·손짓·발짓·눈빛과 음성·표정으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빠르게 판별해 낸다. 영혼은 미세한 주파수로 그 모습을 나타내어 서로가 서로를 읽게 만드는 게 아닐까.
따라서 우리는 영혼의 실체를 모르면서도 그게 무얼 뜻하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혼이 빠진 음식, 혼이 나간 사람, 혼이 없는 우정, 스스럼없이 쓰는 말들을 통해 영혼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다. 영혼이란 있어야 할 진수, 있어야할 진심, 있어야 할 어떤 것이다.
화려하고 번쩍이는 성탄절이 아니라 힘들고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는 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선을 행할 때야 비로소 우리의 말 없는 영혼이 싱그럽게 살아나 숨겨둔 기쁨의 함성을 터트리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도 있던가.
지상의 삶이 멈추는 순간 그 영혼만이 죽음 저편에서 영원한 삶에 참여할 유일한 존재임에야 그 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을 것인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천사들의 합창소리와 함께 태어나신 분을 축하하며 눈길이 닿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리라. 영혼의 기쁨을 나누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