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한 외양간에서 한 아기가 탄생했다. 그는 오랫동안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였다.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화처럼 전해오는 구원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민족을 이끌고 모든 수난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줄 지도자, 메시아를 갈망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기대와는 달리 메시아는 전 인류를 고통 가운데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으로 오신 것이었다.
그런데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고 경배한 사람들은 고작 들에서 밤새도록 양을 치던 목동 몇 사람과 동방에서 먼 길을 찾아 온 천문학박사 세 사람 뿐이었다.
메시아 예수는 왜 이렇게 주목받지 못하고 초라하게 태어나야만 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은 큰 것이 강하다는 그릇된 신화에 속고 있다. 인간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해 세속의 권세를 쥐게 된 ‘사탄’은 큰 것이 강하다는 속임수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들고 권력과 물질과 쾌락의 노예가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큰 것이 가지는 힘으로 정복하고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섬길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큰 것이 가지는 힘으로 과시하고 군림할 수는 있어도 겸손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작은 자’로 오신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이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말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랐다.
예수는 그 당시 천대받는 직업이었던 목수의 아들로 자랐다.
예수는 12군단이 넘는 천사의 힘을 동원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지만 거부하셨다.
그리고 결국 예수는 연한 순과 같이 가장 힘없는 자,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 형틀에서 죽으셨다.
30세가 됐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 곧 천국에 대해 가르치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는 사역을 수행하던 예수는 어느 날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
또 한 번은 자신이 자라났던 나사렛에 갔을 때 회당에 들어가서 약 800년 전에 기록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찾아 읽으면서 그 예언이 곧 자신을 가리켜 예언한 말씀이라고 하셨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더라(눅 4:18~19)”
그러므로 성탄절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확실하다.
더 커지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큰 것이 좋은 것이라는 규모의 논리를 버려야 한다. 거대한 힘으로 정복하려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 요즘 많이 회자되는 ‘갑(甲)질’의 유혹을 떨쳐버려야 한다.
마구간의 구유처럼 더 가지려는 욕심과 더 커지려는 욕망을 깨끗이 비워보자.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구유에 누인 아기처럼 작아져 보자. 동방에서 온 박사들처럼 낮아져 보자.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도리어 내게 주어진 것들로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보자.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현하는 성탄절이 됐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온 국민들이 더 작아지고 더 낮아져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와 함께 하며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한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