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특화거리’와 ‘문화의 거리’
‘먹거리 특화거리’와 ‘문화의 거리’
  • 제주매일
  • 승인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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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단법인 안양문화예술재단 문화정책실장 송경호

제주와의 인연이 25년째다. 해마다 몇 차례 들락거렸으니 얼추 100번 가까이 오갔을 거다. 한데도 여전히 제주는 미지의 땅. 갈 때마다 낯설고 새롭다.

명색이 재외도민에 제주 비바리와 사는 처지가 무색하다. 오랫동안 되도록 넓게, 빨리, 많이 보려 한 탓이다. 뒤늦게 몇 해 전부터는 좁고 깊게 만나려 애쓴다.

올해도 그랬다. 지난봄엔 제주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는 작은 섬 몇 곳을 찾았다. 늦여름에는 서쪽의 오름 몇 곳을, 늦가을에는 비에 젖은 건축물 몇 개를 만났다. 지나는 길에 미처 가보지 못한 4·3 상흔도 찾았다. 이런저런 주제를 따라 홀로 떠도는 즐거움과 이로움이 크다.

애초 코스에는 들어있지 않았지만, 갈 때마다 들르는 곳이 있다. 서귀포의 이중섭거리인데, 그 곳 가까이 사는 처제 때문이다. 지나는 길에 잠시 만나 차 한 잔 하는 곳이 이중섭거리다.

90년대 말쯤부터 꾸미기 시작한 거리는, 갈 때마다 문화적 향취를 더 해 새롭다. 이따금 아트마켓이라도 서면 인근 주민과 예술가들로 북적여 활기가 넘친다. 17년 세월에 제주의 또 다른 명소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내친 김에 제주에 이런 거리가 더 있나 찾아봤다. 최근 크게 늘어나고 있는 ‘문화의 거리’라는 것 말이다. 제주도청 홈페이지를 방문하니 모두 8개의 거리가 소개돼 있다. 서귀포시 이중섭거리와 함께 제주시내 서부두 명품 횟집거리와 국수문화거리·흑돼지거리·바오젠거리(차 없는 거리)와 서귀포시 지역의 또다른 방어축제거리·칠십리음식특화거리·아랑조을거리가 ‘특화거리’란 이름으로 게시돼 있다.

이중섭거리 빼고는 국수와 회·흑돼지 등 거의 모두 ‘먹거리’ 거리다. 그러니 문화거리라는 간판을 걸기 민망했던 걸까. 특화거리라는 알쏭달쏭한 낱말로 비껴가려는 것처럼 보여 씁쓸했다.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많은 자치단체들이 저마다 문화의 거리 조성에 열을 올리고 있는 때다. 아울러 그렇게 조성된 공간 대부분은 음식점·술집·커피숍 등이 차지하고 있다. 이따금 노래자랑 수준의 공연 한두 번 열릴 뿐인데도 문화의 거리라 우기는 곳도 허다하다.

그런데 제주도는 왜 당당하게 문화의 거리란 간판을 달지 않았을까. 대놓고 문화의 거리라 우기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싶었다면 제주다운 순박함이랄 수도 있겠다.

도시에서 문화의 거리가 가지는 비중은 날로 커지고 있다. 거의 모든 도시재생사업의 필수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도시의 다양한 문화와 정체성을 아우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늘 열려 있는 곳인데다, 여러 사람들의 취향과 기호가 모인다는 점에서 도시의 미래 지향적 공간으로 꼽힌다.

따라서 먹거리 거리처럼 ‘현재 그 곳에 있는 것’만 묶어 특별한 거리를 조성한다는 건 길게 멀리 가기 어렵다는 게 정설이다. ‘거리’라는 ‘열린 공간’에서 중요한 건 현재가 아닌 미래이며,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기 때문이다.

제주의 먹거리 거리가 ‘특화거리’라는 어색한 간판을 언제까지 달고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관광객을 향한 포석이며, 어느 정도 돈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될 것이다. 제주만의 풍요로운 문화예술적 자원과 창의적인 정책을 통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드웨어는 어느 정도 갖춰져 있으니 남은 것은 문화·예술적 요소를 어떻게 담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공간에 공공예술 개념을 보태고, 예술인들이 모여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단기간에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니 서두를 일도 아니다. 게다가  답도 그리 먼 데 있지 않다. 개념은 다르지만 이중섭거리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겠다. 김병석 교수 말마따나 문화의 거리란 건 그저 머뭇거림과 기웃거림이 있는 공간, 독자적 문화 패턴과 주제가 있고, 폭넓은 예술 활동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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