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가운데 이번편의 주인공인 진국태는 월계(月溪) 진좌수(秦座首)로 더 잘 알려져있다. 1680년(숙종 6년)에 태어나 1745년(영조 21년)에 사망한 진국태는 지금의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와 옹포리 경계에 살았다. 진국태는 제주 입도조(入島祖, 섬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 진계백(秦季伯)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진정적(秦廷績)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의원으로 꼽히는 ‘허준’에 버금가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진국태는 수많은 일화가 있다. 인술을 펼친 진국태의 정신을 기리는 곳은 도로명 주소로 ‘월계로(제주시 한림읍 옹포리~명월리 약 1.558km 구간)’라고 하며, 이 인근에 한림고등학교가 있다.
▲여우의 구슬 삼켜 ‘신의’ 되다
진국태는 어렸을 적 제주시 한경면 두모리에 있는 서당을 다녔다. 서당에 가던 길에 소나기를 만나 동굴로 몸을 피하게 된 진국태는 그곳에서 예쁜 소녀를 만나게 됐다. 이 일로 인연을 맺게 된 진국태는 소녀와 매일 구슬치기를 하고, 서당에 가서 글공부를 한 뒤 집으로 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진국태의 몸은 악화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훈장은 그를 불러들였다.
“너 어디 아프냐? 왜 얼굴에 핏기가 없어 보이느냐. 그 이유를 말하거라.”
“서당에 오기 전 한 소녀와 구슬놀이를 했습니다. 자신의 입에 구슬을 물었다가 내게 전해주고, 나는 다시 그녀의 입으로 전해 줬어요. 이것 말고는 별 일 없습니다.”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훈장은 진국태에게 다시 소녀가 나타나 구슬을 주면 삼킨 뒤 하늘과 땅을 쳐다보고, 바로 자신을 생각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때 소녀가 여우로 변신해 덤벼들면, 망치로 여우를 죽이라고 얘기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진국태는 그날도 어김없이 소녀를 만나 구슬치기를 했다. 실수로 구슬을 삼켜버린 진국태에게 다가온 여인은 갑자기 여우로 변신해 그에게 달려들었다. 진국태는 하늘과 땅을 볼 틈도 없이 훈장을 생각하며, 여우를 망치로 내리쳐 죽였다.
훈장에게 간 진국태는 “너무 겁이 나서 하늘과 땅을 볼 것도 잊어버리고, 훈장님만을 생각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아쉽구나! 하늘과 땅을 보았더라면 상통천문하달지리(上通天文下達地理, 모든 일을 꿰뚫어본다)했을텐데… 너는 날 생각했으니 의술만은 능하겠구나.”
이 일로 진국태는 신의(神醫)가 되어 사람만 봐도 무슨 병이 걸렸는지 알아맞히게 됐다.
어느 날 대정고을에서 한 부인이 진국태를 찾아왔다. 남편이 병에 걸렸는데, 도무지 무슨 병에 걸렸는지 통 알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부인, 그냥 집으로 돌아가게. 아마 남편은 자네가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걸세. 그리고 여기 오는 도중에 만난 불량배는 이미 죽어 있을 테니, 아까 왔던 길을 다시 가보게.”
사실, 부인은 진국태를 찾아오는 길에 불량배를 만났다. 여자 혼자 힘으로 불량배를 물릴 칠 수 없고, 반드시 살아 돌아가 빨리 남편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몸을 불량배에게 내줬다.
알고 보니 부인은 상부살(像夫殺)의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남자에게 몸을 내줘야했던 부인은 불량배에게 '살기'를 옮겼고, 이 때문에 불량배는 사망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자 남편은 신기하게도 병이 깨끗이 나았다.
▲영조, ‘좌수’ 직함 하사하다
진국태의 의술이 널리 알려져 전라도에까지 이름을 떨쳤을 때다. 그 당시 영조가 등창을 치료하지 못해 팔도의 명의들을 불렀는데, 진국태의 의술을 아는 전라(全羅)감사는 곧 그를 불러들여 한양으로 보냈다. 가난하게 살아 조정에 입고 들어갈 의관은 고사하고 반듯한 옷 한벌 없었던 진국태는 허름한 옷차림으로 임금을 알현하러 갔다.
임금을 기다리고 있던 명의들에게 어떤 사람이 갑자기 달려와 “정승댁 마님이 길쌈을 하다 쓰러졌으니 처방을 해달라”고 사정했다. 임금의 병을 고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명의들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구석에 앉아있던 진국태가 “쌀 일곱 알을 물에 불려서 먹이시오”라고 얘기했다.
모든 명의들은 진국태를 미친 사람이라며 비웃었지만, 몇 시간이 지나자 정승댁 마님의 몸이 다 나았다고 전해왔다. 이에 정승댁은 진국태가 여러 번이나 사양했지만 극진히 대접을 한 후, 임금에게 데리고 갔다.
영조를 마주한 진국태는 거미집과 거미 일곱 마리를 찧어 임금의 등창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고 한다. 진국태의 의술에 감동한 영조는 공을 치하하고 궁중에서 지내도록 했지만, 사양하자 ‘좌수’라는 직함을 내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진국태'보다 '진좌수'라고 많이 불렀다.
▲죽어서도 백성들을 돌보다
1745년 사망한 진국태는 죽기 직전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백성들을 돌봤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특히 어려운 삶을 이어가야 했던 당시 제주, 대부분 돈을 받지 않고 진료하면서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진국태가 죽고 며칠 뒤, 한 백성은 부친의 병으로 위독하자 약을 구하기 위해 그가 있는 한림읍 명월리로 향했다. 이 때 진국태와 마주 쳤는데, 그가 말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고 한다.
“좌수님께 약방문을 얻으러 가고 있는데 어디를 가십니까“
“나는 가야할 곳이 있으니, 걱정 말고 내 집에 가보게. 미리 알고 벌써 약을 지워뒀으니 내 아들이 약을 줄 걸세.”
진국태는 자신을 찾는 백성에게 이 말만 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진국태의 집으로 간 백성은 충격에 빠졌다. 자식들과 친척들이 모여 그의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명월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진국태는 말을 타고 저승길을 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진국태의 무덤에서 밤을 지새면 귀신병이 낫는다는 말도 있다. 말라리아에 걸린 한 백성은 진국태의 아들에게 승낙을 받은 뒤, 그의 묘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백성의 꿈속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침이나 한 대 맞아라”고 말하면서 침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침 맞은 자리가 뜨끔해서 일어난 백성은, 꿈 속에 나타난 노인이 준 침을 맞고 곧바로 말라리아가 나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로 그 백발노인이 ‘진국태’다.
진국태의 후손으로 3대째 한의사인 진모씨는 “가족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를 들었다”며 “하지만 몇 백년 전에 사셨던 분이라, 전설처럼 알려진 이야기 외에는 우리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오직 백성들을 위해 평생을 사셨던 할아버지는 후세대에게도 귀감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