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도 감동한 깊은 효심, 효자로에 서려있다
하늘도 감동한 깊은 효심, 효자로에 서려있다
  • 박수진 기자
  • 승인 2014.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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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이야기 따라]
⑶성산읍 고성리 홍달한 이야기
'산성효자로'

어버이(孝)와 나라(忠) 모두에 마음을 다한 진짜 효자

어머니 위독하자 손가락 피 약으로 쓸 정도 지극정성

숙종 승하하자 매달 초하루 보름 다랑쉬오름서 통곡

부모와 함께 고성리 소수산봉에 묻혀…효행은 계속

일부 어르신들은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후에도 일을 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오로지 후세대를 키우고 가르치고 먹이고 입히면서 쉴 새 없이 움직였던 나날들. 이제는 행복한 노후를 보내야 될 어버이세대가 하는 말은 기자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일찍이 옛 성인이 이르기를 늙은이 젋은이, 남자와 여자가 상생하는 삶은 효(孝)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 ‘길 따라 이야기 따라’ 두 번째 이야기는 효도(孝道)로 정했다. 이 길 위에서 이 시대에 귀감이 될 만한 효자(孝子)를 소개하는 것보다 더 알찬 길 정보도 없기 때문이다.

제주에는 효자가 여럿이 있어 시공간을 초월해 회자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본지는 이제도 ‘홍효자’라고 불리는 홍달한(洪達漢, 1666~1749)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홍달한이 태어난 1666년은 조선 제18대 임금인 현종때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출신인 홍달한은 성품이 소박하고 충성스런 마음과 효행이 뛰어나 그가 행한 효에 대해 수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홍달한은 효도 뿐만 아니라 나라에 대한 충성도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효(孝)와 충(忠)을 행한 인물로 꼽힌다.

홍달한을 기리는 효자비는 현재 도로명주소로 ‘산성효자로’를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

▲평생 어머니 효도로 살았던 홍달한

아버지를 일찍 잃은 홍달한은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정의현관(縣官)의 군교(軍校)를 지냈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간병하려고 직책을 그만두고 귀향한 홍달한은 어머니의 병구완에 좋다면 어디라도 달려가 약을 구해오곤 했다. 단 하루도 소홀함이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극진히 병간호를 하는 것은 일상이 됐다. 너무 가난해 이불도 없이 딱딱한 방바닥에 지푸라기를 깔고 오래 병석에 들었던 어머니는 결국 등에 욕창이 생겼다.

홍달한은 어머니의 욕창이 자신의 보살핌 부족으로 여겨 어떻게 해서라도 포근한 새 이부자리를 마련하려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은 가죽옷을 입은 채 마루에 자면서 불철주야 간병에 혼신을 다했지만, 어머니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고 백약이 무효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어머니 입에 흘려 넣었다고 한다. 그 당시 "환자는 병이 깊을수록 변이 달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홍달한 역시 어머니의 변을 직접 맛봐가며 병세의 차도를 헤아렸다.

▲말총장수의 꾐에 넘어가다

홍달한은 어머니의 병세가 조금 호전되자 몇 달 동안 갈아입지 못했던 가죽옷을 벗었다. 그동안 홍달한은 목욕은 물론 머리도 빗지 못해 가죽옷 틈새마다 ‘이’가 바글거렸던 것이다. 어머니의 병을 고치려면 살아 있는 생물은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그 가죽옷에 바글거리는 이를 죽이지 않고 산채로 다 마당에 놓아주었다고 한다.

때마침 말총 장수가 집집마다 말총을 사러 돌아다니다가 홍달한의 집에도 들렀다. 마침 홍달한이 이를 잡아 마당에 놓아주는 걸 목격했다.

“쯧쯧… 어떻게 사람한테 저렇게 많은 이가 있단 말인가. 이를 왜 저렇게 어리석게 잡지? 한번 골탕이나 먹여볼까.”

말총장수는 홍달한에게 다가가 “한꺼번에 이를 몽땅 잡는 방법을 말해주겠다. 가죽옷을 시루에 넣고 찌면 이가 한꺼번에 죽는다”고 얘기했다.

살생은 절대 안된다고 다짐했던 홍달한이지만, 이를 한 마리씩 잡는 것도 귀찮았고 어머니의 병환도 많이 나았으니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가죽옷은 시루에 넣어 쩌 버리면 오그라들어 입지 못하지만, 홍달한은 이를 알 리가 없었다. 한참 후, 시루에서 옷을 꺼내보니 가죽옷은 오그라들어 도저히 입지 못하게 됐다.

“오래도록 탁연하게 잊지 못할 그 이름이여… 충과 효를 함께 닦아 해와 별 같이 빛이 나네. 3년 동안 촛불 밝혀 북쪽 궁궐 우러러 눈물 흘렸고 6년 동안 시묘(侍墓)하여 정성이 눈물겹네. 행적을 찬양하는 말 대대로 전해 오고 나라에서 정려 세워 그 명성을 표창했네. 후손이 대를 이어 그 가풍을 따르니 먼 지방 탐라 섬에 의리가 밝혀졌네.”
▲하늘의 벌, 홍달한이 용서하다

말총장수는 육지로 나가려고 배를 띄웠다. 그런데 갑자기 파도가 일어 떠날 수가 없었다. 잔잔했던 바다가 배를 띄우기만 하면 사납게 날뛰어 석 달을 기다려도 배질을 할 수 없었다.

답답했던 말총장수는 점쟁이에게 물었다. 점쟁이는 “너는 하늘 아래서 가장 정성이 가득한 효자를 놀렸다! 돌아가고 싶다면 얼른 효자를 찾아가 용서를 빌어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말총장수는 그제서야 홍달한을 찾아가 큰 절을 하며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홍달한이 말총장수를 용서하자, 그 뒤 거짓말처럼 바다는 잔잔해졌고 말총장수는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오로지 어머니만을 위해 하루를 살아가는 홍달한에 하늘도 감동한 것이다.

▲나막신 신고 다랑쉬오름 정상까지

홍달한은 나라에 대한 충성도도 대단했다. 1720년 숙종 임금이 승하하자 매달 초하루 보름마다 성산읍 고성리에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다랑쉬오름 정상까지 나막신을 신고 올라가  궁궐을 향해 절을 하고 통곡하며 삼년상을 치렀다.  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묘와 나란히 묘를 쓰고는 삼년 동안 시묘했다.

그가 국상(國喪)내내 어버이를 잃은 심정으로 나막신을 신고 고행하며 먼 길을 걸어 문상한 사실이 1744년 당시 제주목사였던 김윤을 통해서 조정에 알려졌다. 김윤은 평생 어머니를 모시는 효행으로 희생했다는 이야기까지 함께 전했다. 그 후 조정은 홍달한에게 정3품의 통정대부(通政大夫)와 종2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 교지를, 중추원의 종2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직을 내렸다. 또 그가 죽은 해인 1749년에는 그의 효를 널리 기려 효자비를 세웠다.

다음은 오조리에 살았던 오봉조 훈장(1703~1815년)이 쓴 추모시다.

“오래도록 탁연하게 잊지 못할 그 이름이여… 충과 효를 함께 닦아 해와 별 같이 빛이 나네. 3년 동안 촛불 밝혀 북쪽 궁궐 우러러 눈물 흘렸고 6년 동안 시묘(侍墓)하여 정성이 눈물겹네. 행적을 찬양하는 말 대대로 전해 오고 나라에서 정려 세워 그 명성을 표창했네. 후손이 대를 이어 그 가풍을 따르니 먼 지방 탐라 섬에 의리가 밝혀졌네.”

▲“할아버지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다니 기쁘다”

홍달한의 직계후손 중 한명인 홍원우(74.성산읍 고성리)씨는 “효자비가 세워진 수산1리에 살고 있는 70~80대는 할아버지(홍달한)에 대해 대부분 알 것”이라며 “아직도 할아버지 행적이 나와 있는 족보 등을 종가 댁이 보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다고 하니 기쁘다”며 “우리도 할아버지가 후대에게 귀감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홍씨는 옛 남제주군청 과장과 성산읍장을 지냈다.

한편 효자비는 수산초등학교가 있는 수산1리에서 시흥으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인근에 다다르면 큰 나무 한 그루와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산성효자로’라는 도로명 주소 안내판과 하늘색깔 지붕이 보이는 집 쪽으로 쭉 걸어 가다보면 효자비와 마주친다. 홍달한은 사후에 그의 부모 묘소가 있는 소수산봉에 함께 묻혀 이제도 그의 부모를 향한 가이없는 희생과 효행을 증거하고 있다. [제주매일 박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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