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카 대륙의 광활한 들판 야초 위에서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한껏 펼친 날개와 치켜올린 꽁지 그리고 두 다리로 종종대는 수컷의 춤이 흥미로워 돌리던 채널을 고정했다. 그 구애 춤이 너무도 신기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이, 영상은 새 깃털을 머리와 다리 등에 장식하고 춤을 추며 사냥을 준비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리고 “이들에겐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고 자신들의 식량으로 잡은 동물들에게 감사와 미안함을 표현하는 상호 존중의 평화로운 생존 법칙이 있다. 그러나 백인들에게 자신들의 사냥터를 친절히 알려준 이후 결국 대대로 살아온 자신들의 터전과 목숨까지도 정복자 백인들에게 빼앗기며 그들은 자신들의 평화와 터전을 잃고 말았다”는 내용이 내레이션으로 나오며 높은 벼랑이 내려다보이는 장면으로 화면이 옮겨진다. 그 순간 제주의 현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요즘 뉴스에 오르내리는 중국 자본을 비롯한 외지 자본의 제주 토지 및 경제 잠식에 관한 심각한 문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제주 경제에 톡톡한 도움을 주는 관광과 투자라는 장밋빛 꿈을 그리며 사뭇 행정의 탁월함인 듯 바라본 시선도 적지 않았다. 물론 요즘 신제주나 구도심 상가에 넘쳐나는 중국인 등의 관광객들을 보면 어려운 제주경제에 빛을 비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상, 그 뒤를 잘 살피면 천편일률적인 중국어 대형 간판으로 뒤덮인 상가건물, 호텔과 부동산 투기 등과 연관된 중산간 난개발과 카지노산업이라는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날씨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와 먹빛 현무암에 부딪는 하얀 파도들을 일시에 덮어버린 이호 공유수면매립지엔 중국자본에 의한 카지노 등의 위락시설이 들어서 보려고 채비하고 있다.
그 아름답던 우리 모두의 공공재였던 섭지코지는 대기업을 거쳐 중국 자본에 팔려나가며 ‘그들만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제주 곳곳이 사유화되고 관광을 위한 ‘개발’을 강요당하고 있다.
하지만 물리적 변화만이 관광의 전부는 아니다. 문화가 있다. 전시공간을 운영하다보니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들이 제주를 방문하면 하나같이 “놀랍다” “아름답다”는 말을 쏟아낸다. 아름다운 자연과 독특한 제주의 문화뿐만 아니라 어두운 역사의 그늘마저도 이들에겐 창작의 영감으로 연결됐다.
해녀들의 삶은 미카일 카리키스라는 작가의 ‘Seawomen’이라는 영상작품을 통해 전세계 유명 비엔날레와 영국의 테이트 갤러리 등에 소개됐다. 영국의 한 관람객은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바다에서 경제활동을 하면서 공동체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해녀들에게 감탄해 눈물을 흘리며 영상이 끝나도록 자리를 뜨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제인 진 카이젠이라는 작가는 제주의 4·3을 담아낸 작품들을 통해 덴마크의 촉망받는 젊은 예술가에 선정됐다. 그 결과로 기획된 전시를 통해 유럽 관람객들에게 그리스·스페인·유고 등 유럽인들이 겪은 내전의 참혹함을 제주 4·3과 연관시키며 인권과 평화에 대한 중요함을 공유했다. 프랑스 아르떼 TV에서도 세계 섬 시리즈로 제주의 역사·문화·자연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소개한 적이 있다. 이들에겐 그들 작업과 연관해 제주도가 영감의 원천과 같은 보고가 되고 있다.
최근에는 도외뿐만 아니라 해외 교포도 제주로 이주해 정착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제주가 갖고 있는 자연과 문화와 역사에 매료된 것이다. 오랜 시간 속에 우리들 삶과 함께 만들어진 토대들은 자본과 속도로 일시에 망가뜨릴 수는 있으나 속도와 자본으로 절대 회복될 수 없는 것들이다.
지나친 개발과 속도의 경제가 궁극적으로 닿는 곳은 무엇일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음은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어른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우화인 것이다. 칼자루를 버리고 보살핌에 관심의 초점을 맞춰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