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그들을 버린 어른들
잘못은 그들을 버린 어른들
  • 한애리 기자
  • 승인 2005.0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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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핏줄만 소중하다는 생각 버려야"

얄궂게도 지난 5일, 하늘은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야외나들이를 방해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궂은 비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쌩쌩 달리며 오랜만의 나들이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날 제주도가정위탁지원센터(소장 강철남)는 어린이날을 맞아 도내 위탁가정 30여곳을 초청해 1일 관광을 실시했다.
그 중에 똑같은 머리모양을 하고 빨간색과 청색 원피스로 한껏 여성스러운 깜찍함이 돋보이는 자매가 눈에 띄었다.

"내가 이쪽 잡을래 언니가 왼쪽 잡아"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인 희망이가 박희순(48·여)씨의 오른손을 잡겠다고 난리법썩을 떤다.
언니 보람이 또한 박씨의 오른손을 놓칠 새라 꼭 부여잡고 있다.
드디어 박씨가 상황을 진정하고 나섰다.
"희망아 보람아 여기 예쁜 목걸이 있네. 우리 하나씩 걸어볼까?"
목걸이에 시선이 집중된 자매는 그제서야 또 사소한 다툼을 끝냈다.
희망이와 보람이는 하루 몇 차례고 박씨를 사이에 두고 쟁탈전을 벌인다.

박씨는 그런 아이들이 엄마 품이 그리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에게 굶주린 사랑을 갈구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씁쓸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우리나라가 IMF를 맞은 첫 해, 매스컴을 통해 사업부도로 떠안은 빚 때문에 버려지는 아이들을 자주 봤습니다. 꼭 언젠가 인연이 되면 그 아이들에게 제가 한 따뜻한 식사를 먹이면서 상처를 치유해 주고 싶었어요."
3년 전까지 부산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던 박씨는 갑자기 안 좋아진 몸 때문에 요양차 제주에 왔다가 제주도가정위탁지원센터와 인연이 닿아 희망이와 보람이 자매를 만났다.

"처음 만났던 희망이와 보람이는 선뜻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못했어요. 처음에 이모네 집에 가자고 센터에서 얘기했을 때 '이모'란 사람은 눈도 이 만큼 크고 코도 뾰족한 모양새를 하고 '청소해라' '빨래해라'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고 이제서야 얘기합니다"
희망이네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자매들은 몰라볼 정도로 쾌활해지고 밝아졌다고들 얘기했다.
제주도가정위탁지원센터측은 “5개월 전까지 엄마없이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빠는 매일 아이들을 때리고 정부지원으로 나오는 라면이라도 있으면 삼촌들이라는 사람들이 와서 가져가버리기까지 해서 아이들은 먹지도 못하고 방치되는 꼴이었다”고 말했다.

지금 희망이네 자매는 친인척들에게 노출되지 않고 있는데 앞으로 아이들이 자라서 희망하기 전까지는 알리지 않을 계획이다.
희망이네와 5개월째 지내고 있는 박씨에게는 26살과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딸아이가 있지만 그 전에 낳았던 두 아이가 임신 중에 사산하고 3개월 만에 멀리 떠나보내야 했던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희망이와 보람이에게 자신의 아기에게 못다한 사랑을 쏟아부었다.
'이심전심' 마음이 통했는지 희망이와 보람이는 금방 그를 따랐고 적응도 잘해갔다.
“이날 희망이네는 이모랑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입을 모아 얘기한다.

이런 자매들의 말에 가슴 뭉클해지는 박씨는 “제가 배아파서 낳은 자식이건 아니건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 얘들은 이제 제 아이들입니다”고 말하면서 “제가 언제까지 희망이네와 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건이 허락한다면 이 아이들과 영원히 살고 싶어요. 하지만 또 얘들을 생각하면 부유한 가정에서 좋은 교육 받으면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라며 고개를 떨궜다.

강철남 제주도가정위탁지원센터 소장은 “지금 제주도에는 120세대 180여명이 가정위탁에 참여하고 있지만 절반이상이 친인척관계며 제3자가 나서서 이뤄지는 순수한 가정위탁은 10%에 그친다”며 “자신의 핏줄만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후천적으로 조성되는 제2의 가정 또한 존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동서비스가 천천히 진일보하고 있긴 하지만 사회적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절실한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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