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 돌아오니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119 소방자동차가 막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날 수고하신 소방대원 분들께 고마운 마음 아직도 생생하다.
연기가 오르고 있는 잿더미에는 쭈그러진 가전제품 잔해와 하우스 철골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한참 마을에서 외진 농장이라 멀리 불길 보고 신고한 사람 덕에 그나마 다른 곳으로 옮겨 번지지 않고 창고 하나 완전 연소로 진압이 된 것이다.
임시방편으로 얼기설기 걸쳐 놓은 규격미달의 전선들이 뜨거운 여름 정오, 폭염으로 비닐하우스에 열이 찼을까. 안전 점검을 하지 않은 내 무지와 어리석음이 불러 온 화였다.
그날은 외출복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아 허술한 평상복을 걸친 몸뚱이 뿐,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화재의 현장을 보며 망연자실, 주저앉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기력이 모조리 빠져 나가며 허수아비가 되어 버렸다.
그 사이로 천만 뜻밖에 미묘한 해방감이 서늘하게 등줄기를 흩고 지나갔다. 이 판국에 난데없는 해방감이라니.
기이한 이 느낌 앞에 스스로 당황스러웠다. 필요해서 두고 쓰던 물건들이 나를 소유했었단 뜻일까.
하기야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사할 일이 난감하기는 했었다. 그 짐들이 모조리 없어져서 홀가분했단 말인가.
빈손이 되고 나서 밀려오는 불가해한 이 감정을 달리 해석할 길이 없었다. 허공을 처다 보며 홍소라도 터뜨리고 싶었다.
마음의 공황상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 빈손이 되었구나” 알 수없는, 이 허허로운 자유로움, 소망만으로는 얻을 수 없던 어떤 경지가 내 앞에 있었다.
어쩌면 눈을 뜨고서 죽음을 건너온 심정일지. 죽은 뒤 누군가 모아 태웠을 허접한 물건들을 미리 다 태워 버린 홀가분함. 한동안 전율하며 적멸의 어떤 순간을 건넜다.
한참만에야 현실을 직시한 의식 속으로 암울함이 밀려왔다.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과거가 몽땅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질적 손실은 그렇다 치고 살아온 삶의 흔적을 깡그리 잃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가진 게 별로 없었으니 엄청난 재정적 손실이랄 건 없지만, 몇 권인지 셀 수도 없이 쌓여 있던 책들, 40여 년 써 온 일기, 열두어 번의 이사에도 버리지 않고 간직했던 청춘의 연서, 생의 흔적을 들여다 볼 사진들이 한 줌의 재로 변해버렸다.
무엇보다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살림의 흔적을 모두 잃었다.
남편은 이 어이없는 상황을 겪으면서도 말이 없었다.
침묵이 말보다 더 큰 힘으로 사태를 가라 앉혔다. 그의 침착한 태도가 산처럼 든든했다.
때가 여름이라 한 데서도 견딜 만 했다. 당장 호구지책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를 준비하고 나자 밤이 되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날따라 밤하늘이 왜 그리도 청명하던지. 지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태평한 하늘, 천지는 무심이라, 미미한 생명들의 애환을 살피지는 않는다. 그 것으로 그 운행은 질서가 정연할 뿐.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을 토해 내고서 도인이 다 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 모두, 어느 날엔가 빈손이 되어 떠날 게 아닌가! 누군가에게 권유 할 수는 없지만 좋은 경험 했어”
이미 잠든 그의 숨소리가 평화로웠다. 이제 돌이켜 보니 그 후로 10여 년, “화재 뒤끝은 길하다”며 누군가 위로하던 말이 떠오른다. 우주의 어떤 힘이 그렇게 말하도록 지혜를 주신 것일까. 아무리 큰 공포도 슬픔도 끝이 있다. 그 불행이 지나갈 시간을 견디어낼 마음의 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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