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해인사에 갔던 적이 있다. 그곳 불교용품을 파는 곳에서 유독 나의 눈을 끄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마 소재로 된 천에 쓰여진 글자였다:
‘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 아름답고 내게 고요합니다 ’
그 날 이후 그 벽걸이는 나의 공간에 함께 하면서 오랜 세월 내 눈을 맑게 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정보와 지식만을 논하며 창의력을 일깨우지 못하는 그 어떠한 학설이나 이론보다 이 짧은 글이 내게는 많은 깨우침을 갖게 한다.
몇 달 전에 신제주에 ‘수보리 시민 선방’이 시민들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어졌다. 개원하는 날 동산불교대학 무진장스님의 설법을 듣게 되었다. 그 스님의 설법 내용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에 무엇인가 들어오기는 쉬운데 그 마음을 비우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설법 내용인즉 어떤 동네에 젊어서부터 항상 수염을 길게 기르는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동네 놀이터를 지나는데 어린애들이 그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잠을 잘 때 그 긴 수염을 이불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밖으로 꺼내서 주무세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곰곰이 생각을 해도 자기가 어떻게 해서 자는지 알 수가 없었고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 날 밤부터 할아버지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긴 수염을 내놓고 자면 추운 것 같아서 잠이 오지 않았고 긴 수염을 다시 이불 속에 넣으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을 자지 못했다.
지금까지 편안히 잠을 잤던 할아버지가 어린애들의 얘기를 마음에 담고서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설법에 인용한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내용이 탐욕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잠을 자지 못하며 뒤척이게 되니 사람의 마음 속에 욕심이 그득 들어있다면 어찌될까?
사람들은 각자 어떻게 태어났는가에 상관없이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모가 남보다 못하다고 부잣집에 태어나지 않았다며 자기 자신을 멍들게 하고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태어날 때의 온전한 자신을 평생 제대로 알고 가기도 짧은 세상에서 남과 비교하면서 그 보다 더 나은 자신을 향하여 상승곡선을 그리는데 심혈을 기울이니, 우리 삶에 있어서 불행의 원천이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데 있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힘들어 못 살겠다’는 소리가 입에 베어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보자. 과거와 비교해서 우리가 정말 못살겠다는 것인지......
물질 문명은 풍족한 데 거기에 따르는 정신의 상대적 빈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십여 년 전만 해도 외식을 한 번 하려면 가계부의 예산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 일반 주부들이었다. 지금은 그 때에 비해 어떠한가? 비용을 따지기보다는 무엇을 어디에서 먹을지 선뜻 결정을 못하지 않는가.
발전된 물질문명의 혜택을 과거보다 더 누리고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새벽종이 울렸네’ 음악이 울리면 다 타고난 연탄재를 머리에 이고 달려가던 과거의 내 모습이 기억에서 지금은 희미하다. 그만큼 우리는 물질에 있어서 과거보다 풍족한 시대에 살면서도 왜 못 살겠다고 만
하는 것일까? 채워놓기에만, 올라가기에만 급급하여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우리의 탐욕에 문제가 있다. 마음에서 활활 온 힘을 다해 태우고 나서 기꺼이 제 몸을 버리는 연탄재처럼 마음을 비워보자.
봄꽃 또한 어떠한가. 대부분 잎보다 꽃이 먼저 핀 후 시들지 않고 바로 떨어진다. 그런 후 돋아나는 잎사귀들은 가장 절정인 순간에 자신을 버린 그 꽃들의 아름다움을 바람에게 새들에게 들려준다. 또다시 봄을 기다리라며.....
그러한 자연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맑아지게 되고, 마음이 맑아지니 보이는 것마다 맑아지므로 따라서 눈이 맑게 된다.
욕심 없이 질서를 유지하면서 때가 되면 서로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을 비울 줄 아는 자연은 그래서 언제나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강 연 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