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털린은 ‘소득이 높아져도 꼭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빈곤국과 부유한 국가, 그리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국가 등 30개 국가의 행복도를 연구했는데, 소득이 어느 일정 시점에서 지나면 행복도가 그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당시 논문을 통해 비누아투, 방글라데시와 같은 가난한 국가에서 오히려 국민의 행복지수(Better Life Index)가 높게 나타나고,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행복지수가 낮다는 연구결과를 주장의 근거로 제시했다.
우리 한국의 행복지수가 높지 않다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최근 미국 갤럽이 조사한 행복지수 순위에서도 한국은 138개국 중 90위에 그쳤다. ‘당신은 어제 존중받았는가?’와 ‘어제 휴식을 충분히 취했는가?’ 등의 질문을 한 뒤에 그 대답을 토대로 순위를 매겼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복지수 1위를 한 나라가 파라과이라는 것이다.
파라과이는 100점 만점에 87점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보통 행복지수는 덴마크, 스웨덴 등의 북유럽 국가들이 높게 나온다. 물론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것은 여러 나라의 여러 기관들이 해마다 하고 있기 때문에 순위는 늘 바뀌게 마련이다. 하지만 한국 행복지수는 어디에서 조사를 하든지 간에 늘 낮게 나온다는 것이 문제이다. 경제가 발전해도 국민들이 행복하지 않은 불편한 진실, 언제쯤 우리 국민들은 행복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게 될까?
이스털린의 역설은 여러 연구에서도 입증되었다. 대니얼 카너먼과 앵거스 디턴은 2008~2009년 미국인 45만명을 분석했다. 여기서도 소득이 높을수록 행복감은 커졌다. 그러한 관계는 연간 소득 7만5000달러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증가된 소득이 행복감을 키우는 효과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곧 7만5000달러 이상부터는 돈을 더 벌어도 일상적인 행복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높아진 소득으로 획득된 부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한다. 부의 효과에 익숙해지면 금세 그 행복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행복을 얻자면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죽어라고 일을 해야 한다. 과로로 인해 인간은 더 불행해진다. 행복은 ‘다다익선’과 거리가 멀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한가? 그렇지 않다. 물질의 소유에 대한 대다수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지 않다. 대다수 인간은 적절한 소유에 만족한다. 행복은 오히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욕망이 무한하다는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가정은 전혀 입증되지 않는 신화에 불과하다.
소득이 높아지면 행복감은 증가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는 순간 소득이 증가하더라도 대다수 더 큰 행복을 느끼지 않더라는, ‘이스털린의 역설’에 주목하면서, 제주도의 행복지수는 과연 어디쯤일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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