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기후인가. 여름 기운이 꺾이는 처서가 지났는데 무심하게도 장마기운 가득하다. 많은 비가 쏟아져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해 버린 지역도 있다. 날벼락 같은 침수피해로 추석출하를 앞둔 피해농가는 허탈할 뿐이다.
자연의 변화무쌍함에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대적하기 힘들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농심(農心)은 자연과 더불어 사는 지혜가 녹아 들어가 있다. 자연의 에너지에 순응하면서 뿌린 대로 거두는 소박함 속에는 과욕과 탐욕을 경계하는 절제의 미덕이 함축돼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과거에 비해 건조해지고 각종 크고 작은 범죄가 늘어나는 현상을 우리 마음속에서 사그러지고 있는 농심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농촌을 우리 몸속의 장기에 비유한다면 간에 해당된다. 손발이 아무리 건강하고 얼굴이 잘나고 똑똑해도 간이 병들면 건강한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도시가 아무리 발전하고 잘살아도 농촌이 병들고 피폐해지면 나라가 전체가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을 지탱하는 국민정신은 개척자 정신과 실용주의다. 일본은 일본 정신 위에서 서양의 유용한 것을 받아 들인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을 내세우고 있다.
비슷한 뜻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은 지키면서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인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라는 말이 있다.
1970년대에는 근면·자조·자립을 바탕으로 한 새마을 정신이 우리의 국민정신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보다 앞서 우리에게는 농심(農心)이라는 아주 훌륭한 정신이 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농심은 자연의 법칙과 생명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모든 성장을 기울여 생명체를 가꾸어 가는 농민의 마음이다. 우리 민족의 본래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농심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소박하지만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농사는 수고하고 공들인 만큼 결실을 가져다 준다. 허황된 한탕주의나 불로소득을 노리는 투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 농심이다.
이는 몇 일전 잠시나마 대한민국을 낮은 대로 이끈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와 그 방향을 같이한다. 농민은 생명과 가치를 창조하는 생산자로서 자연과 한 몸이 되어 함께 호흡하는 사람이다.
이런 농민의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농심을 잃어버리고 살다 보면 사회는 혼란해지고, 인성은 피폐해 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사회가 변화의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고 해도 우리 인간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심성은 자연에서 우러나온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자신의 본분에 자족하면서 스스로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농업은 하늘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만큼만 영위할 수 있는 생명산업이다.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따르며 하늘을 의지하고 사는 농민의 농심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만하지 않고 천리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농심은 그저 묵묵히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꾸면서 하늘의 뜻을 받아들인다. 그런 농심이 있는 곳이 농촌이다.
산업화와 공업화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인간 생활의 기초가 되는 농업의 뒷받침이 없는 한 그것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다.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관계가 각박해 질수록 인간은 자연으로의 회귀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게 된다. 사람이 돌아가야 할 최후의 보루는 땅이다. 땅이 있는 곳이 농촌이다.
추석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농촌과 농심을 가족끼리 이야기 주제로 풀어 놓기 손색없는 명절이 추석이다. 이번 추석명절에는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과 그동안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잠시 잊고 지냈던 마음의 고향, 농촌과 농심을 이야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