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가 어려운 질병 ‘교만’
치유가 어려운 질병 ‘교만’
  • 제주매일
  • 승인 201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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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옥자(수필가)
우리는 누구나 겸손함을 인생의 덕목으로 칭송하고 편애한다. 겸손한 사람 곁에서는 편안함과 따듯함을 느끼는 까닭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한국에서의 행보는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의복은 비록 바티칸의 직함과  권위를 상징하여 근엄했지만 그분이 보여준 맑은 얼굴, 밝은 미소는 천진하고 순수해 만나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고도 남았다.
내면에서 비쳐오는 겸손의 빛이 있었다. 낮은 곳으로 향한 시선, 낮은 곳을 품어 안으려는 진정성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카타르시스가 전국을 휩쓸었다. 한줄기 청량한 바람이 지나간 듯.
인간의 본성 속에 깊디깊게 뿌리 내려 치열한 응시와 통찰을 견뎌내지 않고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저 천애 낭떠러지 위에 피어나듯 고결한  꽃, 겸손의 경지에 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무도, ‘교만하게 살겠다. 교만한 사람이 좋아.’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교만에서 자유롭지가 않다. 가진 자, 아는 자, 높은 자의 교만은 그렇다 해도, 없는 자, 모르는 자, 낮은 자의 뱃장과 교만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성과 감정, 지성과 정서가 균형을 이루어 건실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체면을 지키려는 가식, 끝도 없이 잘나 보이려는 교만은 우리들의 난치병이다. 
교만은 자기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타인을 향한 연민이나 배려의 여유가 없다. 당연히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상처를 준다.
교만한 사람을 누구도 반기지 않기 때문에  소통이 끊기고 단절을 겪는다. 해서 내면 깊이 행복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이렇듯 인간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치유하기가 왜 그리 어려울까. 
중대한 맹점이 있다. 타인의 교만은 잘 보이는데 스스로 자기 교만을 의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남의 교만은 견딜 수 없고 내 교만은 유통시키고 싶다.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고자하는 갈망을 버릴 수가 없다. 자기를 우위에 두기 위해 남을 밟는다.
그렇게 교만은 끝없는 불화의 진원지가 되어  암이  숙주를 죽음에 이르게 하듯 교만도 주인을 멸망으로 이끈다. 그렇게 자멸한 사람이 얼마인가.
 인류사의 페이지마다 군왕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교만으로 화를 불러 치욕의 기록을 남기고 갔다.
생각해보면 삶을  지탱해 주는 얼마의 사랑, 우정, 신뢰, 존경, 호감 같은 긍정적 교감이나 정서들은  교만을 조금씩 덜어내고 그 빈자리로 들어온 선물이 아닌가.
좋은 씨를 뿌리고 돌아 선 농부의 밭에 사탄이 몰래 와서 덧뿌린 씨앗, 가라지는 인간의  교만이었을 것이다.  교만의 뿌리가 존재의 근원에 닿아 있어 그 것까지 뽑아내야 하는 일이 구원의 마지막 관문일 것을.
겸손이란 대체 무엇인가! 교만이 자기를  높이는 일이니  반 개념인 겸손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나를 애지중지 하듯 만나는 모든 사람을 아껴 보는 태도, 아, 쉽지 않은 일. 세상에 이보다 더 어려운 일도 있을까.
그러나, 사람에게서 오는 영광을 버리고 나서 그 자리에 내리는 지복, 자유와 기쁨을 어디서 구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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