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작은 농장을 드나드는 세계의 젊은이들을 지켜보다가 나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들을 보았다.
한국,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친구들은 예외없이, 시도때도 없이 스마트 폰이나 아이패드에 열중했고 대화도 부족했는데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대부분 여유시간에 책을 읽거나 이런 저런 질문을 하며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했다.
또 하나 차이점은 아시아 친구들은 특히 중국인들은 농사일을 하는 것을 누가 지켜보는 걸 부끄러워했고 유럽친구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한번은 곧 스탠포드 대학으로 유학을 간다는 중국 아가씨와 프랑스 친구를 데리고 옆집 게스트하우스의 정원 일을 두어시간 정도 도와 준 적이 있는데 ‘왜 우리가 그 집 일을 도와주어야하냐, 관광객이 자기들을 쳐다봐서 원숭이처럼 느껴졌다.’며 중국 아가씨가 울먹거리기에 이런 얘기를 해줬다. ‘너는 너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한가보다. 네가 농사일을 하는 것을 누가 보는 것이 부끄럽다면 그건 네가 농사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나는 육체적 노동을 신성시 여긴다. 심지어 창녀가 작금의 정치인들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바꿔서 만약에 네가 골프를 치거나 수영을 하고 있는데 누가 보고 있다면 그리 부끄럽겠는가? 그들이 너희를 본 것은 아마도 농삿일하는 젊은이들이 하도 희귀해서이리라. 설마 다른 의미로 보았던들 네 인생에 들어있지 않은 이들이 널 쳐다보는 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네가 단지 돈 안드는 여행을 위해 우프를 선택했다면 조금 실망스럽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이니 그럴 수도 있다. 나도 너를 더 이해하도록 노력하마. 어쨌든 그 덕에 우린 그 집에서 맛나는 저녁과 술을 얻어 먹었다.’ 그 아가씨가 바로 답변하기를 “내가 실수한 것 같다. 미안하다.”고 했다. 그녀가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한국의 교육현실과 똑같았다. 이로써 나는 발전하는 아시안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과연 그것이 지속적일 수 있을까하는 우려가 더욱 커졌다.
온갖 전자기기들과 이미지에 의해 주도되는 정보와 지식, 그리고 그것들의 빠른 생성과 소멸은 인내심과 감성을 둔화시킨다.
한글자 한글자 읽어내려가는 사이 머릿속에 펼쳐질 상상의 세계나 내가 만들어내는 주인공의 얼굴과 다양한 감정을 느낄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엄마의 강요로 책을 읽다가 청소년이 되어서 또 어른들의 강요로 시험공부에만 매진한 아이들은 긴 문장을 싫어하고 앞뒤 문맥을 관통하지 못하며 진득하니 결말을 기다리지 못한다.
책을 읽고 안 읽고의 차이가 무슨 문맹의 문제까지 거론될 일일까? 글자를 읽은 들 그것이 사람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지 못하면 이른바 문맹을 넘어 심맹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이는 타인의 삶에 대한 감정이입이 쉽고, 인생을 살다보면 수없이 부딪히게 될 어리둥절한 세상에 좀 더 관대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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