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친정아버지는 남성우월 의식이 골수에 박힌 분이셨다. 외동딸인 나를 두고 “저놈이 아들이었다면” 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지없이 부드러운 사람이라 믿고 선택한 내 남자는 조선 왕조를 동경해 마지않는 구시대적 권위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자신의 잘 못이기 보다는 사회 구조가 남자위주로 짜여 있는 데다 오래고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을 지배하며 길들여진 우월감이 유전자 속에 각인되었을 터이고 어미가 그들을 기르며 주입시켰을 인습의 결과라는 걸 이해할 수는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여자는 아침 일찍 택시도 탈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첫 손님 여자 태우면 재수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번은 이른 시간에 사라봉을 오르며 목이 말라 상수도 관리인 관사 문 앞에 서서 주인을 청하여 물 한잔 주실 수 있는지 물었다가 혼이 났다. 삼다수가 없던 시절이었다. 어디서 여자가 새벽부터 물을 청하느냐는 불호령을 들었던 것이다. 기가 막혔지만 뒤로 물러설 밖에….
지워지지 않은 또 다른 기억 한 토막, 참을 수 없을 지경으로 소변이 마려웠다.
출발 시간이 임박한 차를 놓칠까 봐 볼 일을 미루고 차를 탔는데 그만 낭패였다. 염치 제쳐놓고 기사에게 청해서 차를 멈췄으나 한겨울 산 중턱엔 눈이 무릎까지 쌓여 도저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516 도로를 넘어오는 중이었다. 차창으로 호기심에 찬 눈들이 내게 쏠렸다. “아!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담 뒤로 몸을 숨기고 일을 보았다. 묻은 눈을 털어내며 무안한 얼굴로 차에 오르는데 짓궂은 인사가 날아왔다.
“아주머니 수고가 많았수다.”
와 - 하는 웃음이 터졌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기 반으로 깍듯하게 대답하곤 자리에 앉았다. 왁자하던 웃음은 그쳤으나 편치 않은 심기였다.
남자와 여자란 단지 구조와 역할이 다를 뿐 우열의 차이가 아님을 언제 쯤 깨우칠까.
성서에서나 이 조 역사에는 남녀의 간통을 다루며 남자는 숨고 여인만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 『정절의 역사』라는 책이 발간되어 세간의 눈길을 끌고 있다. 부도란 이름으로 저질러 온 그 처절한 여성 폭압의 역사를 보여준다.
드디어 여성 대통령이 선출 된 대한민국이지만 사회 도처에 여성차별에 대한 제도나 인습이 아직은 뿌리가 깊다. 오늘 날 상상조차 못할 만큼 여성 입지가 치솟았다 해도 남정네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남성 우월주의가 불식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여성의 사회진출을 남자의 기득권 침해로 받아들이는 한 양성 평등은 요원할 터이다.
남자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그들의 공이 아니 듯이 여자역시 여자로 난 것은 그녀들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성이 아니라 실력으로 대우 받는 사회, 인생의 짐을 함께 나누워 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그런 세상이 언젠가는 오리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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