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1%다. 요즘 늘었다고 하지만, 인구로 따지면 60만이 조금 넘었다. 국회의원(3명)도 19대 국회 의석수(300명)의 딱 1%이다. 그런데 원희룡 도지사가 ‘더 큰 제주’를 말하더니, 도민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더 큰 제주’, 그것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작은 것이 큰 것 보다 나은 가치를 말해야 한다.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야무지고 효율적임을 말해야 한다. 큰 도시보다 작은 도시가 평화롭게 느껴지고, 교통과 쓰레기 문제도 덜하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기술력을 말할 때, 누가 더 작게 만드느냐가 관건이 되는 사회가 바른 사회이다. 큰길을 걸을 때보다 작은 길을 걸을 때 낭만이 넘친다.
그러니까 ‘더 큰 제주’는 수정돼야 한다. 우주에 그 많은 별들의 꽉 참, 그것은 작아서 가능하다. 수정란은 작아야만 클 수 있고 새로운 탄생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작으면 사랑 받을 수 있고, 순수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 그래서 작은 것이 더욱 아름답다.
그래서 에른스트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라는 경제비평서를 썼다. 슈마허는 ‘큰 것’보다 ‘작은 것’이 야무지고 효율적임을 실천으로 증명했다. 진정 작은 것이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효율적이다. 우리 모두 큰 것만을 추구하면서, 큰 학교를, 큰 회사를, 큰 단체를 선호하고, 우리나라가 대국이 되기를 소망하며 살아왔는지 모른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라는 소설처럼, 사회는 끊임없이 더 큰 땅을 차지하려 하고 있지만, 주인공이 차지한 땅은 자기가 누울 만큼의 묘지뿐이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말하려면 ‘중간기술’부터 설명을 해야 한다. 중간기술이란 한마디로 생태계를 배려한 소규모의 비용이 들지 않는 기술을 말한다. 슈마허가 주장한 중간기술은 근대기술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데 비하여, 자원재생과 지역 에너지의 활용을 도모하는 동시에 지역의 고용관계까지 배려하는 기술을 말한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출간된 이래 200년을 지배해온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에 도전한 것이다. 그래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은 ‘인간중심의 경제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붙였는지 모른다.
원희룡 도지사는 도정이 추구할 목표가 제주문화, 사람의 가치를 키워 ‘더 큰 제주’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계적 제주연계망을 구축해 ‘더 큰 제주’를 만들겠다는 도정 운영 방침도 밝혔다. 그렇지만 ‘더 큰 제주’ 보다,‘더 작은 제주’의 가치를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지금 당장 ‘더 큰 제주’와 바로 맞닿아 있는 ‘제주국제자유도시’라는 장밋빛 환상부터 깨뜨려야 한다. 투기자본과 난개발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제주국제자유도시라는 ‘더 큰 제주’의 환상을 무너뜨릴 방법부터 찾는 것이 도민에게 다가가는 최상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제주역사의 본질을 익히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에 간직했던 서울시장과 대통령이라는 꿈을 접고, 가장 적은 1%의 도민이 삶을 영위하는 ‘작은 제주’를 가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가 추구하는 ‘더 큰 제주’가 ‘더 큰 서울’, 나아가 ‘더 큰 대한민국’이 아니고, 가장 작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작은 제주’에 바로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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