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사망
‘축’ 사망
  • 제주매일
  • 승인 2014.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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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옥자(수필가)
 호상이라는 말은 한다. 그러나 ‘축 사망’이라면 좀 심하지 않은가.
더러는 “그 사람 잘 죽었네.” 하는 경우가 있지만 내어 놓고 축하를 표시하지는 않는다.
 사자(死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느끼는 까닭일 것이다.
크고 작은 인간사 중에서도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단절이며 상실이다. 거기에 순서가 없어 어린 나이에 사고나 재난, 질병으로 죽는 것은 비통하다. 죽음 앞에 ‘축 사망’이란 말은 당치 않다. 탄생은 축하하고, 임종은  애도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인 것을.
죽음이 남은 자들의 축제가 된다는 것은 지극히 동물적인 행태이다. 자연에서는 어떤 동물의 죽음이 곧 바로 다른 동물들의 잔치자리가 된다.
친구의 노모가 피부암으로 얼굴이 손상된 채 오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간병에 시달려 친구의 얼굴은 늘 그늘져 있었고, 그녀를 만날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무거웠다. 결국 그 분이 세상을 뜨자 친구들은 자신의 어깨 위에서 짐을 내려놓은 듯 안도감을 느꼈다. 조문을 간 자리에서.
“축 사망이다 얘”
한 친구가 속삭이자 정곡을 찌른 그 말에 터지려는 폭소를 감추려고 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축(祝)’이란 ‘축하하다’의 축약어이다. 경사스러움을 기릴 때 사용한다. 결혼, 취업, 승진, 수상, 창립 등등 ‘생육하고 번성하는’ 세상사의 기쁨에 동참하는 말이다.
 고종명(考終 命)을 오복의 하나로 생각했던 선인들도 길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게 아니라 좋은 죽음을 염원했을 것이다.
사람에게 임종의 순간까지 참회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은총이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처형을 받던 오른 편 강도는 과오를 뉘우치자 곧바로 구원의 약속을 얻었다.  ‘티벹 사자의 서’ 역시 인간이 지상을 떠나는 순간에 지닌 의식의 상태가 영혼의 단계를 결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종교 수행의 최종 목표는 품위를 지닌 존엄한 죽음에 이르고자 하는 소망이 아닐까. 
 치유불능인 환자의 소원과 주변사람들의 동의로써 안락사가 고려되더라도 죽음의 과정을 통해 배워내야만 하는 영혼의 각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있다. 
예컨대 ‘화요일의 모리교수’와 같은 정화와 소통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충언이다. 허나 그 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아직 나는 주변에서 그렇듯 감동적인 죽음을 만나지 못했다.
내세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죽음이 축복임을 믿는다. 고통과 슬픔이 끝나는 피안의 세계를 그리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어린 아들을 잃고 슬픔에 피맺혀 있는 엄마의 꿈속에, 아들이 밝은 모습으로 나타나 ‘슬퍼 마셔요 엄마, 나는 정말 좋은 곳에 와있어요’ 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 엄마의 기쁨과 안도가 어떠했을까. 살면서 다친 상처, 지은 죄와 허물이 치유되는 그런 나라로 가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것은 분명 은총이다.
눈 먼 사신(死神)이 아무나 데려가는 일만 없다면 죽음이란 싫어할 일만도 아니지 싶다.
비좁은  삶의 자리를 비워주고 떠나는 일, 그 사람이 뿜어내고 있던 공해의 소멸이란 점에서 죽음은 남은 자에게 축복이기도 하니까.
친구들과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지만 ‘축 사망’이란 결국 맞는 표현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낡은 육신을 벗어나 가볍게 떠날 수만 있다면.
거기 더하여 죽음은 산 자의 각성을 돕는다.
 누구든 죽음 앞에서 언 뜻, 산다는 것의 의미와 무의미를 일별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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