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으로 물들이면 파란색, 노랑으로 물들이면 노란색, 이렇게 물감의 차이에 따라 빛깔도 변하여 다섯 번 들어가면 다섯 가지 색이 되니 물들이는 일이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초등학교에서 미술교사가 첫 미술시간에 아동들에게나 들려줌직한 이 색조에 대한 가르침은 중국의 묵자(墨子)라는 철학자가 세상을 향해 뱉은 쓴 소리 중 하나다.
파랑의 물감으로 물들이면 파란색이 될 것이고, 노랑의 물감을 가지고 물들이면 노란색이 나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이치다. 묵자는 이 지극히 단순한 색염(色染)의 용도를 가지고 군왕과 신하의 관계, 요즘 말하면 대통령과 참모의 관계, 권력자와 백성의 관계를 풀어 놨다. “나라도 물들이는 방법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그는 당대의 왕과 신하의 관계 속에서 충신의 충언에 물들어 태평성대를 이뤘던 천하의 제왕과, 간신의 감언에 물들어 폭군이 된 군왕을 선별해냈다.
묵자는 왕이 신하를 물들게 한 것이 아니라 “신하가 왕을 물들게 했다”는 소위 ‘보필론(輔弼論)’으로 성군과 폭군을 가린다. 순장(殉葬) 마저 행해졌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고대 중국에서 과연 신하가 왕을 물들게 하는 일이 가능했느냐는 것은 의문이면서도, 충신들이 목숨을 건 간언으로 천하의 제왕을 만들었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위대한 제왕 밑에 위대한 신하가 있었을 터인데, 아무리 묵자가 충신과 간신을 그 시대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시킨다 해도 왕 스스로가 신하의 간언을 수용할 수 있는 폭의 큰 인물이아니었다면 천하 성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본래 반듯하면서도 여러 가지를 담을 수 있는 통이 큰 그릇이었기에 그 만큼의 다른 그릇도 알아내고 그 뛰어난 재량(才量)과 격을 인정해 국사를 함께 논함으로써 후대에 자자손손 추앙해 마지않는 성군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충신 있었기에 聖君도 있었다
폭군으로 전해지는 왕의 경우, 충언을 하는 충신들을 내몰거나 죽이고 주지육림에 빠져 악행을 일삼고 행패를 부리고 치부에나 몰두했을 것이 뻔하다. 원래 부패는 위로부터 썩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기회를 노리던 간신들이 여기에 동승 해 왕을 더 타락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했을 터인 즉, 이것이 그가 그 이면에 주석을 달고자 하는 이야기다.
충신과 간신을 예를 들어 한 시대의 역사를 순(舜)과 같은 성군과, 달기(?己)라는 미녀에 빠져 폭정을 일삼았던 은(殷)나라의 폭군 주(紂)왕과 같은 군왕을 대비시킨 묵자의 대비법은 역사에 대한 지도자의 책임론보다도 신하의 책임론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묵자의 이 대비법에서 최근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역시 박정희 정권 시절의 차지철과 김재규, 그리고 5?6공 시절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의 실세로 행세하던 몇몇 참모들에게로 시선은 자연 옮겨질 수 밖에 없다.
이 대비법은 노무현 정권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어떤 참모를 뒀느냐가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여부를 좌우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진리다. 대통령의 거침없는 말이 빚는 파장, 적과 동지의 가파른 구분, 부동산이나 위장 투기한 사람들을 장관직 등에 임명하려다 실패한 사례 등에서 “묵자라면 현재의 청와대 속에서 충신과 간신을 어떻게 선별해낼까”하는 물음을 던져 본다.
간신 용서하는 사회 되어선 안돼
국가권력은 그렇다하고 제주사회 또한 최근 터진 전 권력자 시절 공무원 뇌물사건 등을 접하면서 “구속된 사람이 희생양이냐, 아니냐”의 논쟁 뿐 아니라 “공직을 애초 검은색 물감으로 물을 들인 사람이 권력자냐, 신하냐” 하는 재담들이 풍미하고 있다. 내친김에 과거의 이런 저런 ‘흑막의 사건’들이 등장하면서 “그 좋은 시절 좋은 자리 하면서 싱크 탱크요, 참모요 하던 ‘신하’들은 자신이 그 권력에 어떤 색깔을 물들이고 있었는지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게 된다.
묵자 왈 “나라도 물들이는 방법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고 했는데, 결과론이지만 이 제주사회가 요즘처럼 막가는 것은 ‘물들이는 방법을 안’ 당시의 측근들이 저지른 과오의 탓은 아닌지 묻고 싶다. ‘권력자’가 검은 물감을 가지고 물을 들이려고 해도 이를 죽을 각오로 막지 못하는 ‘신하’라면 그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하고, “몽매한 권력자에게 검은 물을 들이려는 간신을 용서하는 사회가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은 더 중요하다. 이것이 묵자가 결론적으로 설파하려 했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