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서 살며 한국·일본 두 나라 오해 자주 느껴 이는 서로 대화가 없기 때문 문화를 즐기면 언어 실력 자연 덩달아 ‘쑥쑥’ |
▲아버지를 따라 꿈을 따라
아버지의 직장(은행)을 따라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닌 경험이 소녀의 꿈을 만들었다. 창원, 울산, 제주. 낯선 환경은 먼저 다가가 손을 내미는 붙임성과 활동성을 키워주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살면서는 한국인과 일본인간 오해를 지켜보며 진실한 소통의 필요에 대해 생각했다. ‘서로 이야기를 많이 안 해봐서 그런 건 아닐까.’ 소녀는 이때부터 통역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녀의 꿈은 영문, 일문과 같은 문학 번역가가 아니었다. 지식의 확대보단, 당장 쓰일 수 있는 실질적인 언어의 효용에 무게를 둔다. 목적도 분명하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서로를 연결하는, 공동체 소통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싶다.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볕이 따사로웠던 지난 주말, 강수인 양(17)을 만났다. 제주외고 2학년. 영어과에 재학 중이다. 일본에 살았던 경험으로 두 언어를 모두 잘하고 또 좋아한다. 한국외대 통번역학과 진학을 계획하며 공부로 바쁜 생활 속에서도 언어와 관련한 다양한 외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제주도교육청이 주최한 제7회 제주글로벌외국어축제 일환 제20회 전도 초중고 외국어경연대회에서 일본어말하기 부문 금상을 받았다. 같은 해 제주외고 영어에세이쓰기대회 은상, 제주외고 외국어말하기대회 일본어 부문 은상을 비롯해 제주외고 2013 젤코바 리서치발표 우수상, 생활인상, 봉사상, 선행상, 특기상 등을 휩쓸었다. 쉽게 말해 외국어를 잘 하는데, 단순히 언어만 잘 하는 친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세상과의 만남을 즐겨라
강수인 양의 올해 계획표를 들여다보면 그 놀라운 활동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올해는 교내 동아리 회장을 세 개나 맡았다. 역사 동아리 ‘라온하제’(즐거운 내일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와 ‘이글헤럴드’(영자신문 동아리), 그리고 '미니언‘이다.
’미니언‘은 수인 양이 직접 만들었다. “우리학교가 유네스코 협동학교인데, 활동이 없는 게 아쉬웠어요. 세계 평화라는 유네스코의 활동지향에 학교를 동참시킨다는 취지로, 저희는 공정무역을 통해 유통되는 초콜릿이나 커피 등을 팔고 UCC를 만들어 공정무역의 중요성을 알릴 계획이에요.”
수인 양은 동해 표기오류를 시정한 단체 ‘반크’(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 포터’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이름 하여 반크 다국어 통번역봉사단이다. 반크 한국본부가 영어 외 다른 언어로도 한국을 알리기로 하고 지난 1월 전국 32명을 선발해 발대식을 가졌다.
지난해는 더 바쁜 한 해였다. 제주도교육청의 학생 외교관(일본어)으로 1년간 활동했다. 제주교육정책을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해 홍보하는 작업이다. 도교육청이 매년 20여명 내외를 엄격한 심사를 통해 선발하기 때문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매달 일정 분량의 번역 업무를 해내는 것도 적지 않은 부담. 여기에 표선 해비치 호텔에서 열린 제주포럼과 웃뜨르 축제에서 통역봉사를 했고, 도교육청이 주최한 제주청소년포럼에도 4박5일간 참여했다.
▲사랑하면 문화에 빠져라
수인 양의 가장 큰 장점은 외국어를 문화로서 즐기며 배운다는 것이다. 책상에 앉아 문법을 달달 외우며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고서도 실상 언어에는 별 매력을 느끼지 못 하는 ‘샌님’형 학생이 아니다.
그 하나가 드라마 시청이다. 미국, 영국, 일본 드라마를 틈날 때마다 시청하며 그 나라의 문화를 먼저 체득한다. “최근 자주 보는 게 영국드라마 ‘셜록’이에요. TV방영분은 더빙 판이라 자막이 있는 파일을 따로 구입해서 보고 있어요”
여행도 좋다. 괌, 말레이시아,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바티칸 등. 비록 일부는 가족과 함께 패키지로 서둘러 둘러본 정도의 방문이었지만 다르게 생긴 사람들과도 언어만 통하면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며 언어의 매력에 더 몰입하는 소중한 기회가 됐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문득 궁금해졌다. 어린 학생이 어떻게 이렇게 열심히,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을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일기일회(一期一會)’에요. 모든 건 평생에 단 한 번의 만남, 단 한 번의 일이라는 뜻이요. 그런 생각으로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려 해요. 새로운 사람들과도 머뭇거리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고요.”
자유로운 외국어 실력은 학생을 떠나 대다수 사람들의 로망이다. 하지만 다가가는 방법은 모두 제각각. 언어를 문법으로 외우는 사람과 문화로 즐기며 익히는 사람, 누가 더 그 나라의 진짜 모습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일기일회'를 얘기하는 수인 양의 말에 그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