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가 이익을 좇으면 언론이 외로워지지”
“경영자가 이익을 좇으면 언론이 외로워지지”
  • 문정임 기자
  • 승인 2014.0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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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언론 50년 김경호 본지 논설위원

▲ 1962년 제주신문사 옛 사옥의 모습. 발췌=제주오십년사
▲ 1970년대 신문 활자를 고르고 있는 모습. 발췌=제주시오십년사
김경호 본 지 논설위원이 논설위원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박민호 기자
 
1964년 <제주신문> 공채 1기로 입사
사전검열 있던 군부정권서 자본가에 의한 新언론탄압기까지
반세기 언론에 투신

[글 제주매일 문정임 기자-사진 박민호 기자]

“한 날은 통신사에서 우표 2장과 사진설명을 보내왔어. 하나는 남한 체신청에서 발행한 거고 다른 하나는 북한에서 발행한 거. 항아리 모양이었는데 두 우표가 아주 비슷해. 사진설명을 보니 북한 것이 우리 것보다 몇 달 앞섰더라고. 만일 표절을 했다면 우리나라가 한 것이겠지. 당시 내가 편집할 땐데, 1주일에 한 번 나가는 어린이판에 우표수집 관계자들을 실어주는 내용이 있어서 그래 이걸 싣자 했어. 그런데 며칠 후 중정(중앙정보부 제주지부)에서 전화가 왔어. 이걸 왜 실었냐고. 어린이 판이라 실었다고 했더니 그래서 더 의심스럽다는 거야. 북한이 먼저 발행한 걸 실었다는 거지. 어린이들이 이걸 보면 어뜩하냐고. 당시 신문은 세로쓰기를 했는데 어린이판만 지금의 신문처럼 가로쓰기를 했거든. 나는 가로쓰기에 따른 우선순위로 왼쪽에는 남한, 오른쪽에는 북한 우표를 실었는데 중정에서는 세로쓰기에 익숙해선지 북한 걸 먼저 실었다고도 본 거야. 1주일간 불려 다녔어. 얼마나 고생 했는지. 검열이 그만큼 까다로웠다고. 그때가 1960년대 말, 내가 <제주신문>에 다닐 때야.”

본지 김경호 논설위원(77)이 지난 3월 1일자로 언론 봉직(奉職) 50년을 맞았다. <제주신문> 공채 1기로 입사해 제주문화방송과 대한일보·월간 ‘제주개발’·제남신문을 거쳐 현재 <제주매일>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1964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현대사의 질곡과 제주지역의 변화, 언론의 숱한 개폐를 목격한 제주 언론의 산 증인이다.

김 위원이 입사한 1964년은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듬해였다. 군사정부는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포고 1호와 계엄사령부의 검열방침을 통해 언론을 정비·관리하고 있었다. 김 위원이 입사한 <제주신문>은 1962년 이러한 군정 방침에 따라 기존의 <제주신보>(1945년 제주민보로 창간)와 <제민시보>(1956년 창간)가 통합해 탄생한 곳이다. 이 시기 군부는 신문을 사전 검열했다. 사상이 의심되는 모든 문장·사진·제목이 삭제됐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집권하면서는 언론통폐합이 단행됐다. ‘언론계 구조개선’이라는 명목아래 신문·방송·통신사에 대한 물리적인 구조조정이 이뤄졌고 많은 기자들이 해임됐다. 이 사건을 기자들은 ‘언론대학살’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본권력에 의한 신(新)언론탄압 시대가 도래했다. 정부탄압이 있던 시절의 신문경영인들이 지역문화사업의 하나로 긍지를 갖고 신문사를 운영했다면 지금은 사업의 배경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인 경우가 많다.

김경호 위원과 긴 인터뷰를 가졌다. 한 개인의 50년은 제주지역 언론사(史)의 50년과 맥을 같이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김 위원의 눈은 추억을 상기하듯 깊어졌다가 환해지고 촉촉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 처음 입사하던 날의 풍경을 얘기해 달라.
=1964년 3월 1일. 이 날은 절대 잊지 못 해. 그때는 견습기자라고 했는데, 북교에서 바닷가 내려가는 방향에 사무실이 있었어. 공채 1기, 기자가 8명 정도 있었던 것 같아. 고정일씨가 편집국장이었고 동기로 함원종·송민훈·故 김용우가 있었어. 그때는 200자 원고지에 펜으로 기사를 썼어. 전화기가 귀하던 시절, 검은 다이얼 전화기가 편집실에 한 대, 취재실에 한 대 정도 있었고.

딱 들어가서 보니까, 발하고 손으로 움직이는 수동인쇄기로 신문을 찍고 있더라고. 그 뒤 윤전기라고 부르는 기계가 들어왔지만, 지금의 기계와는 전혀 딴판이었지. 롤러에 연탄 뗀 거를 올려서 조판을 하고 석면지를 위에 놓고 압축기계로 눌러 지형을 뜨는 방식. 원통에다 조판 뜬 거를 기둥에 둘둘 말아 넣고 납물을 거기에 부으면 납판이 나왔는데 그걸 롤러에 놓고 돌렸어. 이렇게 수정 작업이 어려웠으니, 그 땐 편집기자들은 문선공이나 인쇄공하고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고.

▲ 필드를 뛰며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또 언론의 활동이 가장 위축됐던 시기는.
=기자 50년 동안 절반은 군사독재 밑에서, 절반은 민주화 이후에 보냈어. 군사시대는 정말 어려웠어. 기사를 마음 놓고 못 쓰니.

제남신문 편집부국장 때 사회부장이 오성찬씨(소설가)였는데. 그때가 전두환 시절, 함석헌(민중운동가)이가 들어온다는 정보가 나한테 들어왔어. 이 양반은 이름·사진만으로도 회자될 것이 분명했어. 오 부장을 공항으로 보내 인터뷰를 성사시켰고. 함석헌 옹 발언이 기대이하이긴 했지만 그래도 만족했지. 사진 넣고 박스처리해서 사회면에 딱 담았고 최종 교열 다 보고 인쇄기에 넣었는데, 마침 군부에서 연락이 왔어. 오늘 제작하는 신문부터 전부 검열을 받으라고. 그래서 고민에 빠졌지. 기사는 내보내고 싶은데, 검열에 들어가면 수정 지시가 올 것이 분명했으니까. 꾀를 냈어. 밑에 기자보고 함석헌 사진·제목·이름 다 빼고 지면도 사회면에서 문화면으로 옮기고 기사 본문만 넣어 검열을 보내라고. 아, 그랬더니 통과돼서 왔어. 그날따라 그들이 꼼꼼히 읽지 않은 거야. 통과됐으니 이제 우리도 명분이 생긴 거지. 그래서 다시 제목이랑 사진, 이름 다 넣어서 그대로 나갈 수 있었어. 다음날 연락은 왔는데 자기네가 봐도 검열판과 기사 본문 내용은 똑같으니 크게 뭐라 말하기는 힘든 듯 했어. 그 사건 이후로 광고까지 다 검열 받게 돼 신문사들이 모두 고생했지만. 지금 후회되는 게 당시 군부가 수정 표시해놓은 검역 판을 버리지 말 걸 하는 거야. 죄다 좋은 역사가 될 것들을.

▲ 군부시절 또 다른 에피소드가 궁금하다.
이건 제주신문에 있을 때. 1면 편집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 1면은 중앙기사로 채웠고, 내용은 주로 합동통신이랑 동양통신(두 곳이 합쳐져 지금의 연합통신이 됐다)이 지방 계약사에 송고하는 기사를 썼어. 통신사에서 모르스 부호(점과 선의 조합으로 구성된 메시지 전달용 부호)를 이용해 보내면 지역 신문사에서 수신사들이 헤드셋으로 듣고 한국말로 옮겨 편집부에 보내고 했는데. 그 날은 1월 2일쯤 대통령과 각 정당 총재들의 신년사를 넣는 날이었어. 보통 야당 총재들의 말은 뻔해. 정부를 까는 거. 당시 민주당 박순천 총재가 연두사를 발표하는데, 그날 하필 일기가 나빠 우리 수신사가 기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친 거야. 그 놓친 부분이 바로 ‘이 기사는 검열 전이니 수정이 있기 전까지 보류’라는 내용이었어. 그걸 몰랐던 우리는 야당 총재의 정부 비판 신년사를 1면에 원문 그대로 다 내보냈고 그날은 밤새껏 술을 마셨어. 이제 끝이구나 하고.

지난 50년간 한국사의 파란만장한 변화만큼 제주지역도 변했다. 가장 급격한 변화가 불어 닥친 시기는 언제였나.
5·16도로 개통과 어승생 댐 건설이 이뤄졌을 때. 이게 상당히 많은 변화를 가져왔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남북 통로가 뚫리고, 식수난이 일정부분 해결됐거든. 또, 민주화도 꼽을 수 있어. 이건 제주는 물론 우리나라 전체로도 역사적인 이슈이지만 말야. 이 무렵 기초의회가 만들어지면서(1991) 지금의, 일상적 민주화가 점점 확대돼온거잖아.

▲ 지금 제주지역 신문사는 일대 변혁기에 있다. 오너가 계속해 바뀌고 건실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기자들은 매일 현장을 취재하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서는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젊은 기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또, 50년 기자인생을 먼저 겪어 온 대선배가 보는 좋은 기자란.
=(한참 뜸을 들이다)후배에게 바라는 것과 좋은 기자 상(像)은 일치할 텐데. 언론에 대해 기자는 반드시 천직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 참 필요해. 기자가 이걸 가질 때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어. 이제는 기자도 직업이 되는 시대라 구식 얘기라 할 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기자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해. 좋은 기사의 발로. 그 기준은 내가 기사로 하여 보람을 느끼는 가 아닌 가의 문제. 

▲ 군사 정부 때와 자본권력시대. 어느 쪽이 더 언론활동을 위축되게 만들까. 또 이럴 때 지역사회와 독자들의 노력도 필요할 텐데.
=기자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신문경영인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왔다. 과거 경영인들은 권력화하거나 돈을 벌려는 목적이 아니었어. 외려 이걸 하나의 지역문화사업으로 인식했고 자기자본에 의한 사회공헌 같은. 그래서 긍지를 갖기도 하고. 하지만 요즘 자본가들은 그런 의식이 없어. 만약 경영자들이 이런 의식에서 운영을 한다면 지역사회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겠지. 경영자들이 이익을 좇으면 언론이 외로워지지.

▲ 소회  한 마디. 지난 시간을 지금 돌이킬 때, 오랜 직장생활을 곧 그만두는 시점에서의.
=비행에서 떨어지는 꿈을 많이 꾸게 될 것 같다. 젊은 시절, 회사를 이직할 때 며칠씩 틈이 있으면 꼭 이런 꿈을 꾸곤 했다. 왜, 기자들에게는 경쟁의식이 있지 않나. 굳이 특종이 아니라도 취재 욕심 말이야. 내 눈앞에서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카메라를 못 찾아 버둥대는 꿈을 자주 꿨었어.
어느 새 50년이 됐는데 난 전혀 후회가 없어. 내가 어느 직장을 택해서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겠나. 도서관 곳곳 신문들에 내 손길이 묻어있으니 변함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무언가를 남긴 셈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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