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각계 원로들이 ‘효 살리기 운동’에 나선 적이 있었다. 부모를 살해하는 등 반인륜적인 잔혹한 범죄들이 잇따르는 현실을 보다 못해서였다. 부모를 모시면 세금을 감면해주고 아파트 분양권도 우선적으로 배당하며 효도휴가도 갈 수 있도록 한다는 얘기가 이때 나왔다. 이러저러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효도세(稅)의 신설을 추진하기도 했었다. 또 기독교인들이 십일조를 바치듯이, 노부모에게 수입의 10분의 1을 ‘용돈으로 드리자’는 운동도 펼쳤다. 모두 좋은 발상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효(孝)란 무엇인가. 효는 어버이를 잘 모시는 일이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진정한 섬김이어야 한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실행해야 할 도리(道理)는 수없이 많으나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도리는 부모를 정성으로 섬기는 일 즉, 효도이다. 부모와 자식과의 사이는 끊을 레야 끊을 수 없는 핏줄이요, 천륜(天倫)관계가 아닌가. 그래서 효는 백행(百行)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효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질만능주의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으로 효사상은 점차 퇴색되고 있다. 거기에다 효는 케케묵은 관행이고, 고리타분한 유교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제 효는 우리 사회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잊혀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효사상이 동서고금과 종교를 초월한 전 인류적인 윤리라는 것이다. 효를 강조한 공자(孔子)의 가르침 이전인 아득한 옛날부터도 조상을 숭배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이어져왔으며, 종교 역시 기독교 불교를 가리지 않고 효를 중시하고 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바른 길이다.” 성경은 이처럼 효도를 당연한 일로 가르치고 있다.
불교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 자식들은 8만4천 섬이나 되는 부모의 젖과 피와 사랑을 먹고 자란다.” 부모는 이렇듯 무한량의 정성과 희생으로 자녀를 키우고 보살피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은 마땅한 일이요, 극히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일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웃어른을 위하는 일이 사람의 근본 도리임을 알면서도,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효도가 너무 어려운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효도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과, 부모를 꼭 모셔 살아야만 효자라는 사고(思考)를 바꿀 필요가 있다.
언제 어디서든지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현대적인 효라고 생각한다면 한결 부담 없이 부모님을 섬길 수 있을 터이다. 부모님의 은혜를 알고(知恩), 감사하며(謝恩), 보답하는(報恩) 마음가짐이 참된 효심이요 효성이 아닌가 한다.
한때 효도세(稅)라는 말이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효도법(法) 얘기가 들려온다. 효도를 권장하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효 지원 책’을 마련토록 하는 효행장려법안이 곧 국회에 상정되리라는 소식이다.
그 발상이 매우 가상하여 눈물이 나올 정도이지만, 글쎄 우리의 전통윤리인 효를 법으로까지 강제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나하는 생각에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법 제정에 앞서 효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바로 잡을 수는 없을 것인가.
기성세대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부모는 부모들대로, 어른은 어른들대로 매사에 모범을 보이고 사랑으로 훈육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남의 탓, 젊은이들 탓만 하면서 말이다. 어른들이 나서서 효를 되살려야한다. 효야말로 모든 인간행동의 뿌리임에 서랴.
이 용 길 <제주산업정보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