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사람들이 망년회다 송년회다 바빴을 터,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내게 그런 호사는 물 건너 간지 오래다. 12월이 되면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아이가 선물을 받지 못하면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안주었으니 나는 나쁜 아이구나.’ 생각할까 두렵고 동심을 해칠까 걱정스럽다. 반면 크리스마스 전후 두 달 간은 긍정적인 면이 꽤 있다. 얄팍한 육아 술수라 부를 수 있겠으나 “아들! 동생이랑 잘 놀아줘야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주실텐데......” 한마디면 몇 시간은 편안하다. 조용히 잘 노는 것은 물론이고 때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니 어찌 산타할아버지께 고맙지 않을까. 며칠 전 일곱 살이 된 큰 아들은 내게 다가와 고백할 것이 있다며 귓속말을 했다. 아들의 고백과 신랑의 후일담을 종합해보니, 큰 아들이 화살을 부러뜨렸는데 아빠에게 동생이 그랬다고 했나보다. 아무리 장난감 화살이라도 이제 네 살 된 동생 힘으로는 부러뜨리기 쉽지 않은 것 같아 아빠가 넌지시 한 마디를 했단다. “그렇구나. 아빠는 잘 모르겠는데 산타할아버지는 아실거야.” 밤이 되어 아빠 옆에 누운 아들은 결국 자기가 그랬는데 혼날까봐 그랬다고 고백을 하더란다. 이튿날 아들은 그 사실을 모르던 엄마에게까지 고백을 했는데 녀석은 영 불안했는지 밤에 잘 때 산타할아버지에게 “잘못했습니다.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고 마음속으로 빌었단다. 정작 빌어야 할 대상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동생인데 말이다. 그런데 따지기 좋아하는 나로선 우리의 망태할아버지를 두고 서양할아버지 눈치를 보는 아들이 영 개운치 않고 심술이 일었다. 나는 내 멋대로 분석하는 습성이 있는지라 어쩌다 망태할아버지가 산타할아버지에게 밀려났는지 생각해보았다. 망태할아버지는 50년대쯤에 생겨났다가 산업화에 밀리면서 80년대엔 거의 사라졌다. 일단 그 역사가 길지 않고 눈에서 사라진 망태할아버지를 누가 기념하여 재현해주는 일도 없다. 유치원에서, 거리에서 때만 되면 출몰하는 산타할아버지랑은 게임이 안 되는 거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아마도 채찍과 당근의 차이가 아닐까? 망태할아버지는 잘못하면 잡아가지만 잘했다고 망태에 선물을 담아주지 않는다. 산타할아버지는 잘하면 선물을 주지만 못한다고 잡아가지 않는다. 공포와 협박보다는 역시 달콤한 유혹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망태할아버지든 산타할아버지든 아들이 너무 어린나이부터 착한아이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릴까봐 꺼림칙하다. 사실 아이는 주위환경, 특히 부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이 당연한 이치다. 좋은 심성과 부드러운 행동을 바란다면 산타할아버지에게 기댈게 아니라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아주 교과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나야말로 망태할아버지에게 잡혀가야 하는 엄마가 아닐는지.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어떻게 키우겠다는 다짐을 잊고 신기한 세상을 몸으로 체득하며 자신의 개성을 발산하는 아이들을 자꾸만 말 잘 듣는 아이로 가두는 것 같다. 산타할배가 착한 어른한테도 선물을 준다면 나도 달라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