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 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四肢)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김수영의 시 ‘그 방을 생각하며’의 전반부에서 발췌했다. ‘혁명은 되지 않고 방만 바꾸었다’는 구절의 시가 다시 읽히고 있다. 역사가들은 ‘역사교과서 분쟁’에 불씨를 지피고 있다. 영혼치유에 분주해야 할 종교인들도 ‘세상걱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순리를 거슬러 행동한다. ‘도행역시’(倒行逆施)는 잘못된 길을 고집하거나 시대착오적으로 나쁜 일을 꾀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史記』「伍子胥列傳」에 등장하는 말이다. <교수신문>은 2013년 사자성어로 도행역시를 뽑았다. 무엇이 순리를 거스르고 있을까?
물론 여기에는 박근혜 정부의 퇴행 정치를 지적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어째서 도행역시일까? 지금 정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퇴행적으로 후퇴시키는 정책·인사를 고집하고 있다, ‘유신체제의 추억’을 되새김질하려는 국가권력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동반하고 있다.
물론 국민들은 한국 최초의 여성대통령, 부녀대통령으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리더십을 기대했다. 대통령제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지난 2백수십년 동안에 단 한 번도 없었던 ‘부녀대통령’의 한 사람이다. 과거의 시대로 회귀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권위주의적 모습이 더 많이 보인 한 해였다. 대선 공약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에 침묵하고, 소통보다 불통을 고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박근혜 정부는 4·19혁명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유신체제, 군사독재, 문민·참여정부 등으로 이어지던 우리 현대사를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계승할 중요한 고비에 서있다. 폭력과 공포정치와 싸운 국민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쟁취했던 표현과 집회의 자유, 노동과 결사의 권리, 최소생존권을 보장하는 복지와 사회보장 등이 위협받거나 취소될 수는 없다.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얻고 출범했던 박근혜 정부의 1년은 유감스럽게도 상식과 역사를 거슬리는 일들이 억지로 고집되고 꾸며졌던 한 해였다. 종북·빨갱이, 새마을과 정보정치, 성장우선주의 등의 단어들이 좀비처럼 부활해 이데올로기적 진영나누기와 시대착오적 감시처벌로 세포분열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 가닥 빛이 있다면, 그것은 ‘혁명 이후 세대’인 이 땅의 청소년들이 스스로 새로운 역사의식을 벼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는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네트워킹이 비누거품처럼 번지고 있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 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김수영의 시 ‘그 방을 생각하며’의 후반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