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제주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창문 아래로 펼쳐진 경치는 한라산과 오름, 그리고 여러 작물이 심어져 자라고 있는 밭들의 조화로 이루어진 한 폭의 그림이다. 특히 봄철의 제주를 하늘에서 보면 유채의 노란색과 메밀꽃의 하얀색과 초록이 피카소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때 여러 색을 구분하면서도 아름답게 눈에 띄게 만드는 역할을 돌담이 한다. 검은 색으로 다른 형상의 색을 구분 짓고 있는 제주 돌담 역시 하나의 회화인 것이다.
매번 태풍이 온 섬을 휩쓸고 지나간 다음 느끼는 점이 있다. 거센 태풍에 의해 아파트 콘크리트 담벼락은 무너졌지만 제주도 고유의 돌담은 무너지지 않고 태연하다는 사실이다. 나뭇가지에 달린 연약한 잎사귀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한꺼번에 떨어질 것 같은데, 오히려 잎은 그대로인데 나무가 뿌리 채 뽑히는 경우가 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돌담 사이에도,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에도 틈이 있다는 것이다. 틈이란 세차게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바람이 지나도록 길을 열어주는 아량의 통로이다. 틈이 없이 온몸으로 바람을 막고자 고집을 피우면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돌담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틈이 있도록 담을 쌓는 제주인의 여유에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억지는 아닐 것이다.
평상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도 태풍처럼 갑작스레 다가오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때마다 바람을 막고 서서 부딪히며 해결하려고만 한다면 상처를 입기 쉽고 바람직한 결론에 도달하기가 어렵게 된다. 비바람이 불 때 이를 피하는 방법은 돌담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틈새를 남겨두는 거다. 용서
하고 포용하는, 때로는 이기기보다 져주는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할 듯하다.
내 자신은 스스로 덜렁쇠라고 생각하는데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내를 완전주의자라고 말한다. 내가 배우기로는 완전주의는 정신병 중의 하나이다. 완전주의자란 잘못된 초인적(환상적) 자아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영적 에너지를 투자하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만족하기보다 비현실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좌절감, 우울증, 불공평하다는 느낌에서 비롯되는 분노가 인격의 밑바탕에 형성되고 그로 인해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그러면 나는 여러 사람들이 인정하는 이런 정신병자란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 스스로는 덜렁쇠다. 내가 완전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사실 내가 웃을 일이 아닌데 남의 일처럼 웃음이 나온다.
어느 신용협동조합과 거래를 오랫동안 한 관계로 그 곳 직원들과 꽤 친한 편이다. 어느 날 통장 정리를 하려고 신협 문을 들어서자 직원들이 “어서 오세요??하며 인사를 하는 순간 구두를 신은 내 발목이 삐걱거리며 나는 그만 옆으로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었다. 다행히 재빠른 운동신경으로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나의 우아함(?)이 대신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는 걸 이미 한 여직원이 동시에 주저앉아 웃기 시작한 뒤에 알게되었다.
남자 직원들도 표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다 결국 모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나의 작은 실수가 자아낸 웃음으로 실내 분위기가 밝아진 게 아닌가. 나중에 여직원이 죄송하다며, 평소 나를 너무 완벽하게 보아서 그런 실수조차 하지 않고 사시는 분 같다고 말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자신이 화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이 바로 내가 아는 나의 참 모습이니까.....
그렇게 덜렁거리는 나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빈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생활 하나 하나에 힘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엿보기 때문이라고 생각 해본다. 나도 모르는 나의 무의식 속에는 뻣뻣해진 내가 아직도 거만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태풍에 무너진 아파트 시멘트 담벼락이 그런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며 제주 돌담의 틈새가 지닌 여유와 포용성을 마음에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