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건의 도민 희생자 규모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몇 천명일 것이라는 집계와 수 만명에 이른다는 분석까지 조사기관과 4.3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분명한 것은 무고한 도민들이 '이데올로기 논리'에 의해 희생됐고 상당수는 그 실체마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이 시기에 '일본행'을 택한 제주 도민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여지껏 조사되거나 시도된 적이 없다는 것이 4.3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들은 거의 '행방불명자'로 취급됐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무라카미의 자료를 보면 '난민'이라는 동정적 처지가 아니라 일본정부에 의해 '국가를 어지럽게 만들지도 모르는' 공산주의자로 취급되면서 강제송환된 제주도민들의 흔적은 일본내 사료집에서 간간이 눈에 보일 따름이다.
해방이후부터 1950년까지 일본으로 향한 제주도민 가운데 국내로 다시 송환된 도민들은 어떠한 처지에 몰렸고 그 규모는 얼마 정도인지.
일본-부산-제주로 강제 송환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57주년을 맞은 제주도민이 시급히 찾아내야 할 선조들의 자취라는 분석이다.
▲해방공간에서의 도일(1945.8.15~1947.2)
무라카미 나오코는 이 시기의 도일 이유를 경제적인 것으로 들었다.
이에 일본정부와 GHQ는 1946년 후반부터 조선인의 재도항자에 대한 배타적인 자세를 강화했다.
1946.5.7-GHQ'일본인 및 비일본인의 귀환에 관한 각서'는 '한번 본국으로 귀환한 자는 연합국 최고 사령관의 허가없이 일본에 돌아 올 수 없다'고 규정했다.
같은해 6월 12일 GHQ의 '일본으로 불법입국 억제에 관한 각서'에 이어 18일 일본 내무성은 각 부현 경찰에 '일본으로의 불법입국억제에 관한 건에 근거한 잠정적 긴급단속 요강'을 통보했다.
1946년 후반부터 일본정부는 '밀항자'와 재일 조선인에 대해 억압적인 자세를 노골적으로 표명했고 이에 앞서 중의원 본회의에서 진보당 소속 權熊三郞은 '특히 조선인 같은 경우는 일본 경찰력이 미약한 것을 틈타 흉기를 소지하고 무리를 지어 놀랄 만큼 흉악성을 발휘, 주민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는 망언을 했다.
▲3.1절 사건, 4.3 사건이전의 도일(1947.3.1~1948.3)
일본당국이 파악하는 이 시기의 밀입국자수는 6888명으로 이 중 6296명이 강제송환됐다.
8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규슈(九州) 지역에 도착한 밀항자수는 15척 479명으로 이 가운데 11척이 일본 정부에 의해 적발됐고 387명이 돌려보내졌다.
무라카미는 이 시기의 도일배경에 대해 1947년 초기부터 미군정을 포함한 경찰, 우익단체에 의해 격화된 좌익탄압과 무장투쟁의 방침에 찬성하지 않는 장년층 공산당원이라고 추측했다.
▲4.3 봉기~한국전쟁 발발전(1948.4.3~1950.6)
이 시기에 일본과 GHQ 는 제주 도민들을 '구분없이' 모두 공산주의에 물든 '불순분자'로 여겼다.
1948년 3월 26일 일본정부는 '해상보안청설치 준비위원회 규정'을 만들었다.
미 제8군은 같은 해 5월부터 도일 제주인을 점령의 목적에 '유해하다'고 지적하기 시작했다.
미 8군이 이 당시에 밝힌 내용을 보면 '조선인의 불법입국과 불법출국의 탄압은 밀무역이라는 관점만이 아니라 점령의 목적에 유해한 활동을 하는 인물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치안문제로도 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제주도민의 도일 규모는 아직까지 정확한 분석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다만 4.3 사건 이후 해상교통의 단절을 비롯해 해군에 의한 공중정찰과 해안마을의 경비, 연락망의 단절, 야간통행금지, 여행증명제, 계엄령선포, 경찰. 경비대. 우익청년단의 증강 등으로 도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유추해석만 가능하다.
여기에 4.3 사건 이전의 도민수 집계와 사건이 종결된 1950년의 인구수 대비를 통해 행방불명자로 분류된 도민들의 상당수가 도일자일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 4.3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정부에서 마련한 4.3 진상보고서에도 희생자 신고 내용 중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강제 송환된 뒤 처형당한 피해 사례'가 눈에 띈다.
GHQ자료는 1948년 4월~6월 3개월 동안 규슈(九州)에 제주도의 밀항자 규모는 49명이고 모두 검거했다고 확인했다.
또한 1948년 6월 12.13일자 大分合同新聞은 '제주도의 내전을 피해 도망한' 밀항조선인 36명을 모두 검거했다고 보도했다.
1948년 9월 1일 USAFIK, G-2 보고서는 1948년 8월 25일 일본으로 향하는 불법밀항자 70명 전원을 제주도경찰에 넘겼다고 적었다.
佐世保時事新聞은 1948년 7월 26일자에서 제주인 13명을 붙잡았다고 알렸고 다른 신문은 9월 12일 제주에서 온 여성 15명을 포함한 101명이 상륙했다고(잡힌 것으로 추측)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