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자식을 사육한다고 하지 않는다. 물론 가축을 기르며 양육한다고도 하지 않는다. 둘 다 성장을 돕는 일이지만 양육은 존재를 지키는 일이고 사육은 동물들 에게 쓰는 말이다.
어느새 한해가 기울어 12월도 하순이다. 교차로는 물론 호텔이나 관공서 마트나 백화점엔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고 상점마다 특수를 바라는 상품의 진열이 현란하다. 예수의 탄생일은 신도가 아니라도 축하분위기로 세계가 들썩이는 듯하다.
성서에 기록된 몇 가지 예수님의 가르침이 엉뚱한 의문을 떠오르게 했다.
천국을 설명하고자 했던 비유들은 너무도 유명해서 세간에도 잘 알려져 있는 바다. 선한 목자의 비유를 보자. 삯군이 아닌 목자는 양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고 양을 돌본다. 하지만 양이란 악한 목자에 시달리거나 선한 목자에 보호 되거나 결국 주인을 위해 털을 깎이고 고기를 공급해야 하는 존재다. 선한 목자라 해서 영원히 양의 생존을 지킬 수 없다. 그 것은 목자의 질이 아니라 양의 운명에 관한 문제인 까닭이다.
다음은 어부가 낚아 올린 물고기의 비유, 좋은 고기는 바구니에 골라 담고 나머지는 버린다는 내용이다, 어부가 바구니에 담은 고기는 팔리거나 얼마간 식탁에 놓이리라. 바구니에 담긴 생선이 죽는다는 점에서 양의 운명과 같다. 선한 목자에 인도 받던 양의 목숨이나 어부에게 선택되어진 고기나 모두 인간의 이용물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곡간에 들인 알곡의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죽정이나 가라지는 불에 태우고 알곡은 농부의 곡간에 거두어들인다는 비유다. 이 가르침 역시, 곡간에 쌓인 알곡의 모습을 떠올리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영원히 창고에 있을 수는 없으니 어느 날엔가는 식탁에 오르기 위해 빵이 될 것인가.
예언자를 쓴 칼릴 지브란은 사랑의 송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신의 거룩한 향연을 위한 신성한 빵으로 구워지도록
성스러운 불꽃 위에 올려놓는 것>
그는 < 신성한 빵으로 구어 지는> 그 일이 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의 일이라 생각했을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고난의 생애를 마감하시려는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하는 빵을 나누어 주며 말씀하셨다.
“받아먹으라, 이는 내 몸이니라”
신성한 빵이 되셨음을 선포하고 나서 십자가의 처형에 순복하셨다. 인간의 죄를 탕감하기 위한 제물이 된 것이다. 그 분의 희생을 기념하여 오늘날도 성찬의 빵은 영혼의 양식이 되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이 지상에서 짧은 생애를 사시며 천국의 백성이 되도록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나도 천국에 가고 싶다. 고통과 슬픔이 없는,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 꽃이 만발하고 과일이 풍성하고 사랑과 미소가 넘치는 그 나라에.
그러나
사육 된 양들이 주인을 거슬릴 수 없듯
추수된 알곡이 농부의 손을 벗어 날 수 없듯
붙잡힌 고기가 어부의 뜻을 바꿀 수 없듯
거룩하신 이여 우리는 다만 피조물일 뿐
당신의 뜻대로 쓰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