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에 희망을 심는 사람
농촌에 희망을 심는 사람
  • 한애리 기자
  • 승인 2005.0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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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農夫). 땅을 파고 시를 뿌려 흙과 하늘의 기를 조화롭게 받아들여 열매가 맺히게 가꾸는 사람.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수 많은 생물종 중에서 유일하게 먹거리를 가꿔 살아가는 지혜로운 동물, 그 동물들의 생명을 연명시키는먹거리의 터전, 삶의 근원인 흙을 가꾸는 사람이다. 그러나 최근 농촌에는 애기울음소리가 듣기 힘들정도라는 농촌에는 지금, 태반의 노인과 학생수에 비해 비대해져가는 학교, 빈집만이 지키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동녘이 밝아오는 밭으로 나가 곳곳에 자연과 숨쉬는 생명체들을 샅샅이 살피며 보살피는 농촌을 소중히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해야 할 일을 너무 많이 남겨두고 쏜 살같이 나이만 먹은 것 같아 나이를 물어오는 질문에 난감해집니다”

허송세월 보낸 과거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일들을 내다보며 달력에 지나간 날짜에 ‘X’표를 하면서 내일의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기보다 설레는 내일을 기다리는 남제주군 안덕면 창천리 김명진씨(47).

‘희망이 있다’는 것은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았다는 것과 남아 있는 일에 대한 기대가 잔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름에는 벼나 콩씨를 뿌려 가꾸고, 가을과 겨울에는 감귤을 수확해 다섯 가족 배부르게 먹이고 남는 양식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팔아서 아이들 공부도 시키고, 한창 멋내기를 좋아하는 중학교 2학년 큰아이의 예쁜 옷도 사줘야 한다.

배 곪지 않을 정도의 재산이 있고, 자녀들이 이루는 꿈 이룰 수 있도록 뒷바라지 잘 하는 것.
가정을 이룬 부모라면 지극히 보편적인 바람이고 과제이지만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과 달리 김씨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귀농인’이다.

1997년 IMF때 아내와 함께 경영하던 건축사업이 부도를 맞으면서 서울 어느 곳에서든 재기를 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도 있었지만 스스로 ‘농촌으로 돌아갈 운명’에 순응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청각이 좋지 않았던 그는 1984년경에는 생명에 위협을 느낄 정도까지 건강이 악화돼 전북 무주 구천동 어느 산 속에 들어가 자연에 몸을 맡긴 채 요양을 겸한 산촌생활을 지냈었다.

만4년이 지났을 즈음 이미 그의 건강은 놀라울 정도로 호전됐고 아내 김영희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흙의 기(氣)와 하늘의 기(氣)를 받아 살아야 하는 운명이어서 서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다”며 “더욱이 이북출신이셨던 조부모님도 농사를 지으셨고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었던 집안이어서 그런지 농사가 내 업(業)인 것 같고 편안하다”고 말했다.

김씨가 제주에 자리를 튼 지 6년째인 그는 감귤재배와 더불어 감자와 콩, 표고버섯재배를 하고 있다.
친환경농업에 뜻을 같이하는 이웃 6∼7명이 모여 잡초를 베어내 청초액비를 만들고 독성이 강한 독초는 살충제를 만들고, 당밀, 쌀겨, 골분, 어분 등을 섞어 발효시킨 보카시 유기질 비료를 만들어 사용하는 등 제초제와 화학비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생산작업에만 그치지 않는다. 땅에서 나는 모든 먹거리를 100% 활용하기 위한 연구에 연구를 그치지 않는다.
흙을 떨어내고 그냥 ‘아그작 아그작’씹어 먹어도 사람에게 무해할 정도의 친환경 농작물들이니 버릴 것이 하나 없다.

감귤의 경우 동글동글 모양이 일정하고 상처가 없는 상품들은 생과로 공급하고 모양이 일정치 않은 것들은 통째 원액을 만들어 일년내내 저장과 더불어 새콜달콤 감귤의 맛을 맛 볼 수 있도록  주스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크기가 큰 감귤의 경우는 껍질을 벗겨 사용하는데 껍질은 또 차로 끓여 마실 수 있게 가공한다.

이런 노력과 오랜 실험을 통해 올해부터는 주스에 이어 ‘다류’,  감귤껍질을 이용한 차를 가공해 판매할 수 있는 승인도 받았다.
하지만 김씨는 가공식품을 대량으로 생산하지는 않겠다는 아이러니하면서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가 먹을 만큼 내 주위사람들에게 나눠줄 만큼만 만들 작정입니다. 생산량이 대량화되면 가공작업에 묶이게 될 게 뻔한데, 전 농사를 짓는 것을 목적으로 제주에 안착했지 공장장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거든요.”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가공을 위해 만든 공장 시설비만 1억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지만, 들어간 비용이 아깝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본전찾기’에 전전긍긍하는 장사꾼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라는 것을 살짝 비쳤다.
“제주사람들도 그건  모를 겁니다. 말린 귤껍질을 갈아서 된장국이나 김치에 넣으면 그 맛이 일품이라는 걸요?”

김씨는 그가 개발한 가공식품을 상품화한 이후에도 끊임없는 실험과 검증을 반복한다.
자신이 소비자라는 기준에서 먹어보면서 엄정한 검증을 거치면서 신뢰를 쌓는다.
상품화를 위해 오랜 시간 실험을 거쳤다는 것은 그의 작은 공장 옆 사무실을 마주하면 사무실 곳곳 흔적을 통해단번에 알 수 있다.

그가 친환경농업을 시작한 것은 농사에 조예가 깊었던 큰아버지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큰아버지 댁에 가서 농사일을 거들었던 적이 있었었는데 큰아버지는 1970년대 당시 ‘금비(金肥)’라고 불릴 정도의 비료를 사람들은 없어서 못 뿌리는 상황에 대고 ‘절대 화학비료를 쓰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던 분”라며 이어 “큰아버지의 말씀이 지금 제게 투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아직도 제주 감귤은 메리트가 충분히 있다고 확신하는 그는 앞으로도 좁은 땅에 생산물에 대한 부가가치를 높여 줄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연구할 것이다.
사람과 동물, 식물을 함께 가꾼다는 것, 즉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근본적인 범죄를 없애고, 환경을 보전하는 방책을 찾고, 윤리와 도덕을 바로잡아 흙을 등지지 않는 농심을 더욱 가꾸는 일. 그것이 그의 희망이다.

“아직 난 갈 길이 먼 농붑니다. 날이 추우면 추워서 싹이 늦게 나온다고 해서 경박스럽게 초조해하거나 좌불안석하지 않고 자연이 주는 그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좀 더 빨리 생산해 얼마나 더 이익을 보겠다고 자연을 거슬러 인위적으로 조건을 만든다던지 하는, 비닐을 덮어 감자를 생산하는 일도 올해가 마지막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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