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3과 제노사이드
4ㆍ3과 제노사이드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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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은 미군이 남한을 점령한 사이(1945.8.15-1948.8.15)에 발생하였다. 당시 제주사람들의 항거와 투쟁이 누구에 대한 항거였는가?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는가? 그리고 그 주체는 누구였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솔직한 답을 내려야 한다. 대통령은 지난 2003년 10월 31일 ‘제주4·3사건에 대한 대통령 발표문’을 통하여, “.............과거 국가권력이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며 국가권력의 잘못을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정부는 수립되어 있지 않았고, 미군은 연합군 세력으로 한반도 이남을 점령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주사람들의 항거를 무력으로 진압한 장본인이 누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제주항쟁의 탄압을 수행한 이승만 세력은 미국의 용병 역할을 다하였을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최근 정부는 4·3사건에 대한 진상보고서도 확정·발표하였다. 그런데 미국과의 관련부분이 여전히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미군정 시절 일어난 사건에 미국의 개입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미국은 작전통제 전권을 갖고 한국군을 지휘했을 뿐 아니라, 자국군 대령을 직접 지구사령관으로 보냈다. 특히 1948년 11월 국군 9연대의 중산간 마을 초토화작전을 진두 지휘하는 등 미국이 주민 학살에 개입한 증거는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제노사이드(genocide)를 자행한 미군 세력은 제주민중을 유도하여 제주민중이 일어나면 되받아 치는 작전을 자행하였다.

 과거 미국 대통령들은 세계 곳곳의  대량학살을 막겠다고 너스레를 떨어왔다. 지미 카터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떠올리며 “결코 다시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며 그 끔찍한 학살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레이건은 “나는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결코 다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클린턴은 “결코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허용해선 안 된다”고 단호하게 외쳤다. 하지만 “결코 다시는” 이라는 말을 반복하던 미국 최고 지도자들의 언약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세계 도처에서 빚어진 대량학살의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제노사이드는 라틴어로 집단학살을 의미한다. 세계는1948년 제노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국제협약을 맺었다. 그리고 1949년 제네바 협정은 전시(戰時)에서도 민간인에 대해서 고의적인 살인, 고문 등 비인간적 행위, 고의적인 괴롭힘이나 신체상해, 군사적 목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대량 파괴와 약탈 등을 금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1948년 제주섬에서는 이런 국제법이 요구하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되었다. 특히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다.
제주민중은 냉전의 최대 희생자였으며, 바로 이 점이 4·3사건의 진상규명을 50여년 동안 억제해온 요인이 되기도 했다. 

제주도가 20세기 가장 처참한 제노사이드의 기억을 딛고 상생과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기 위해 4·3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또,  ‘미국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9·11 테러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숨겨진 의도와 함께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김 관 후 <북제주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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