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주의자’
‘이승만주의자’
  • 제주매일
  • 승인 20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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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후 시인.소설가
▲ 김관후 시인.소설가

일진회(一進會)는 1904년 8월 송병준이 조직한 친일 단체이다.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막후의 조종자나 고문으로서 그들의 계책을 실천하는데 급급했다. 일제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하여 국내의 여론을 이른바 '합방의 방향'으로 유도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정치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선언서' 기초 작성, 유세, 강연회 등의 매국행각을 감행했다.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긴 을사늑약을 찬성했던 친일단체가 바로 일진회이다.

러·일전쟁 막바지였던 1905년 8월4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과 면담하였다. 이를 두고 이승만이 고종 밀사로 파견된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뉴욕헤럴드 트리뷴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은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라면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고 대한제국과 고종을 부정했다.

최근 이승만이 미국 체류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문서가 공개되었다.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 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8년 이승만의 징집서류에는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다.

이승만이 직접 작성한 이 카드에는 나이·음력생일·직업·하와이 거주 주소 등 인적사항들이 나와 있다. 또 ‘가장 가까운 친척’은 이 심(Shim Rhee)으로 관계를 ‘누이’로 한국 주소와 함께 작성했고, 인종은 ‘동양인(Oriental)’이라고 표기했다. 논란이 되는 것은 이승만이 자신의 국적을 ‘일본’으로 기재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 주위에는 ‘이승만주의자’들이 많다.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일부 학자들이 바로 ‘이승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4·19 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을 ‘가장 유능했던 독립운동가, 탁월한 외교가, 대한민국의 설계자’로 부각시키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그들 중 어느 학자는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은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한 끝에 드디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낸 야곱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위업”이라고 했을 정도다.

이러한 ‘이승만주의자’들은 이승만을 미화하기 위해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교과서를 집필하면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프린스턴 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 교수이기도 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명백한 사실 오류로, 윌슨은 이승만이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할 당시 총장이었고 지도 교수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은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 소식이 알려지면서 임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생겨나기도 하였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당시 독립운동 진영에서 불만을 표한 대상은 임시 정부가 아니라 도리어 위임통치 청원 등 여러 차례 전횡을 휘두른 이승만이었다.

요즘 역사 교과서 논란의 쟁점은 이념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친일·독재를 합리화하는 듯한 역사 서술에 이어 역사적 사실관계의 오류와 왜곡이 바로 그 중심에 있다. 역사문제를 ‘한국 대 종북’으로 재단하면서 이념공세를 펼치고 있다.

독일이 나치 시절에 침략한 폴란드·프랑스와 공동 역사 교과서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나치의 만행을 반성하고 주변국들에 사과했기 때문이다.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철저한 사과 없이 대화를 하는 공동 역사 연구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친일파를 미화하고 식민지 시기가 한국을 발전시켰다고 보는 교학사 교과서의 논리는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며, 이런 논리로는 제대로 된 공동 역사 연구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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