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 제주타임스
  • 승인 200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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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自殺)이 어제오늘에 생긴 일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그 도(度)가 더욱 심해지고 있음을 본다. 심지어는 인터넷을 통한 의기투합(?)으로 동반자살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생활고·가정불화·건강악화 등 이유는 많다. 시험성적이 부진하다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고 자살을 한다. 치욕적인 모멸을 당해서도 목숨을 끊는다. 소외감·상실감도 원인이 된다.

 그들이라고 삶의 귀중함을 모를 리 없다. 오죽해야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겠는가고 항변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생명만은 안 된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태어나지 아니한 것처럼 죽는 것도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우리의 ‘생(生)과 사(死)’는 오직 신(神)만이 결정할 일이다. 때문에 자살이야말로 인간 최고의 악(惡)이며 최대의 죄(罪)임을 알아야 한다. 그 어떤 극한적인 상황에 처한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은 선택해서는 아니 된다.

 중국 한대(漢代)의 유명한 사가(史家) 사마천은 남성의 고환을 제거하는 궁형(宮刑)을 당했으면서도 살아야만 했다. 궁형은 남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정말 참기 어려운 수모이다. 사마천도 당초에는 죽고 싶은 심정뿐이었다. ‘삶과 의로움, 이 두 가지를 함께 얻을 수 없는 경우에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는 선인의 말을 떠올리며 생을 마감하려 하였다. 하지만 ‘역사서를 저술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야 했다. 삶을 택한 것이다.

 그러면서 사마천은 그의 친구 임안(任安)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용감한 이라고 해서 반드시 절의(節義)를 위하여 죽을 필요는 없으며, 약한 자도 의리를 숭앙하여 어디에서든지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비록 목숨을 아끼는 겁쟁이이기는 하지만, 나아가고 물러섬의 기본은 제법 알고 있는 편입니다.

노예나 비첩조차도 자결할 줄 아는데 어찌 난들 자결할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비참하게 모욕을 견디며 더러운 진흙땅에 뒹굴면서도 목숨을 끊지 않았던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다하지 못한 한(恨)을 풀기 위함이었으며 만일 죽어 버린다면 내 문장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이 이렇듯 치욕을 당하면서도 구차한 목숨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바로 책(역사)을 저작하기 위함이었다. 마땅히 죽었어야 할 사람이 이를 악물고 살아난 것은 분명한 목표와 사명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굴욕을 참고 살아 남은 자의 용기와 저력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삶에서 부딪히는 난관이나 고통은 오히려 분발과 힘의 원천이 된다. 생명력 있는 불후의 명작들은 대부분 그 지은이가 참담한 재난과 불행을 겪은 연후에 저술되었다. 그들 가슴속에 쌓인 울분이 마침내 격정으로 승화하여 창조의 힘을 불러일으킨 결과이다. 무서운 열정과 의지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냄으로써 역경을 순경(順境)으로 바꾸고 찬란한 업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그의 ‘사기(史記)’를 써내려 가면서 인간사의 불공평한 현상에 대해 심각한 회의(懷疑)를 갖기도 한다. 착하고 의로운 사람은 화(禍)를 입고, 나쁘고 좋지 않은 사람은 오히려 복을 누리는 까닭이다. 권선징악(勸善懲惡)·사필귀정(事必歸正)을 믿는 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이 일만이 고귀하고도 유일한 생명을 내려 준 부모와 신에 대한 보답이자 책무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난제가 닥치더라도 ‘하늘은 선한 사람의 편이며, 또한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념으로 굳세게 살아야 한다. ‘자살’은 거꾸로 ‘살자’라고 하지 않는가.

이  용 길 제주산업정보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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