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의 이야기다. 마침 애조로가 뚫리며 농장 북쪽 백여 미터 지점에 육차선 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방풍림 역할을 하던 칙칙한 삼나무를 베어 내고 장비를 불러 억새와 칡넝쿨로 뒤엉켜 발조차 들일 틈 없던 밭을 뒤엎었다. 경사면은 돋우고 둔덕은 허물어 반듯한 땅을 만드느라 전심전력을 다했다. 조금은 환해진 듯하다.
빈 터로 두면 수고한 보람 없이 잡초가 무성해 질 게 틀림없으니, 늦은 봄에야 서둘러 관상목 천여그루 심었다. 심고 나서 비가 오지 않아 계속 나무에 물 주느라 체중이 엄청 빠졌다. 물 줄 때마다 생기를 회복하는 녀석들은 기특해서 더 주고, 시들거리는 놈에겐 살아나길 바라며 물을 더 부었다, 바로 그 순간에 ‘아,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신다는 성서의 말씀이 떠오른 것이다. 죽어가는 묘목을 살리려는 마음, 이게 바로 잘 못을 고치고 올바로 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이 아닐까. 죄와 악이 지축을 흔들어도 아직 기다리시는, 신의 자비가 계속되는 이유를 알 듯 했다. 사람이 다시 창조의 의도 데로 사는 날이 오게 될지 아득하지만 식물 한 포기조차도 살아나기를 비는 절절한 이 심정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거니 싶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죽어가던 나무뿌리 근처에서 기적처럼 올라오는 새 순을 발견했다! 그렇게 되 살아 난 나무가 거의 반에 반을 넘었다. 보람이란 이런 것이야, 한 숨 돌리며 지주 대를 세우고 조심조심 비료도 주었다. 여름, 가을, 겨울, 잘 견디고 해가 바뀌어 다시 여름, 금년 제주도엔 장마가 실종이었다. 폭염은 사정이 없고 비는 오지 않았다. 어느 날 잠시 잠간 비다운 비 한줄기 내려 타들어 가던 여름작물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고맙던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예부터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 했다. 하지만 오늘날도 그러한가. 아니다, 사막도 옥토로 만드는 세상이다!
제주도는 해변으로 빠지는 물도 많고 우기에 쏟아지는 빗물을 가두어 두는 공사를 잘한다면 물 부족 사태는 없을 것이다. 아직 너무도 소극적인 물 관리 행정에 문제가 없는지 검토해 볼 일이다. 오는 지방 선거에서 도의 수장을 뽑을 때는 이 문제를 반드시 거론해야 하리라. 농업용수, 하늘만 바라보는 시대는 지났다는 걸 보여줄 사람이 필요하다. 빠르게 변하는 기후에 대응하여 살아남을 길을 모색해야 할 때가 너무 늦지 않기를 부탁하고 싶다.
일 탐으로 지치면 문득 끼고 있던 장갑 벗어버리고 서둘러 땀을 씻는다. 냉수의 찬 기운에 생기를 찾고 남쪽 창을 열어 한라산을 바라본다, 날마다 보는 산은 변신의 천재다. 오늘은 흰 구름 한 조각 머리에 얹고 유유자적하다. 어김없이 불 볕 더위가 숨을 조이더니 처서 지나며 선들 바람이 일고 그 어간에 천행으로 비도 흡족할 만큼 내렸다. 제주도 여름 농사가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셈이다. 태풍이 없었던 덕으로 참깨 고추 농사는 풍작이란다.
<만물은 오고와도 다 오지 않고, 가고 가도 다 가지 않는다.>고 읊었던 화담 서경덕의 시가 떠오른다. 마음이 허허롭다.
공옥자(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