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 김덕남 대기자
  • 승인 2005.03.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1950년대 초 손로원이 노랫말을 쓰고 박시춘이 곡을 넣어 백설희가 불렀던 가요 ‘봄날은 간다’의 1절이다.
이 노래는 당시에도 인기리에 불려졌었지만 반세기가 넘은 오늘까지도 출중한 남녀가수들이 앞다투어 리메이크 해서 애창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콧소리 섞인 깊고 그윽한 마성(魔聲)을 지녔다는 한영애가 매혹적이고 주술적인 목소리로 열창하여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저릿저릿 저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봄날은 간다’가 현존 우리 나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자리 매김 됐다.
한 시(詩) 전문 계간지가 국내 유명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가 그렇다.
이 노래의 어떤 부분이 사유(思惟)깊은 시인들의 감성을 자극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노랫말에 의한 것이든, 곡이 좋아서든, 아니면 가수의 매혹적 목소리 때문이든 ‘봄날은 간다’의 마력은 그 속에 감도는 봄기운과 거기에 녹아 흐르는 봄 향기에 있을 성 싶다.

아마 노랫말 속의 생뚱스러운 봄날의 덧없음과 속절없는 사랑의 맹세도 잠자던 감성을 흔들어 깨웠으리라.

계절 잊고 허겁지겁 달려온 세월

봄은 여몄던 대지의 옷깃을 열어주는 손길이다. 거기서 얼었던 땅의 가슴을 데우고 잠자던 초록의 감성을 흔들어 깨운다.
그것은 생명의 힘이다. 부드럽지만 힘찬 용솟음이다.
메마른 가지에 입김을 불어넣어 연록의 잎새를 키우고 꽁꽁 언 땅을 녹여 겨우내 품었던 새싹들을 틔운다.

죽었던 풀 씨들이 손 흔들며 살아나고 썩었던 꽃씨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새록새록 돋아나는 순간순간 들이다.
이른 새벽 오름을 오르면서 이 같은 봄의 경이로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사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계절을 잃어 버렸다. 표나게 바쁜 삶도 아닌데 무엇에 쫓기듯 허겁지겁 달려온 나날. 그래서 아예 계절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삶의 호흡이 너무 가빴고 너무 거칠었던 세상 살이었다.

그래서 ‘봄은 계절의 출생이며, 여름은 봄의 성장이며, 가을은 봄의 열매며, 겨울은 봄의 휴식’이라는 사계(四季)의 순환논리를 교란시켜 아예 마음속 계절의 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
그랬는데 오름에 올라 봄기운에 취해 버린 것이다. 젖빛 안개 속에 묻어나는 봄 향기를 맡은 것이다.
몸에 감기어드는 바람은 아직 차가웠지만 거기에는 분명 ‘싱숭생숭 꽃바람’같은 두근거림이 흐르고 있었다.

오늘에 감사하고 현재에 최선

잃어버렸던 봄을 새롭게 만나고 기억상실의 계절을 다시 살려 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그것은 신이 준 선물이다.
그래서 봄을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감사하며 겸손하고 경건하게 봄을 맞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미스터리며 오늘은 선물(gift)이라고. 그래서 현재를 선물(present)이라 했다.

그렇다. 오늘은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가 매순간 맞이하고 보내는 현재는 더 큰 선물이다.
오늘에 감사하고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그 동안 모두가 잃어버렸던 봄의 메시지다.
그러나 세상엔 아직도 봄이 멀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는데 봄 같지가 않은 것이다.
모두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빗장을 걸어 제 욕심만 갈무리하고 있어서다.

그러니 봄의 노크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봄의 향기도 맡을 수가 없다.
이렇게 부질없이 봄날이 가버린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메마르고 삭막해 질 것인가.
그래서 글머리에 50년 애창곡 ‘봄날을 간다’를 떠올리는 것이다. 대지가 봄의 문을 열어 모두를 아우르듯이 우리도 이 삽상(颯爽)한 봄날에 마음의 빗장을 풀자는 뜻에서다.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받아들이고 아쉬움 없는 봄날을 가꾸자는 것이다.
그래도 속절없이 봄날은 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