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회운행됩니다”-이용길
“감회운행됩니다”-이용길
  • 제주매일
  • 승인 201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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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의 일이다. 서울과 강원도를 잇는 국도변 평야지대에 ‘소. 주.밀 . 식’이라고 한글로 쓴 큼지막한 푯말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 간판들이 논(畓)에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논에서 일을 할 때 마시는 술은 ‘소주’로 하고, 음식은 ‘밀가루’로 만든 것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라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당시 농정당국은 벼 수확량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소주밀식’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널리 권장하였다. 한자어인 소주밀식(小株密植)은 모내기를 할 때 ‘모 수(數)는 적게 잡는 대신, 촘촘하게 심어라’는 의미였다. 이 해괴한 한자말을 아무런 설명 없이 한글로만 써놓았으니, 알아보는 사람이 과연 있었겠는가.
  제주도내에서도 있었다. 제주시와 서귀포사이 한라산 동쪽 숲길에 ‘수간주사’라고 한글로 쓴 대형 현수막이 여럿 걸려 있었다. 이 역시 한자말인 수간주사(樹幹注射)이다. ‘솔잎혹파리를 방제하기 위하여 나무에 약물을 주사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얘기는 더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도로공사 현장에서 흔히 보아온 ‘노견주의’라는 것이다. 노견은 또 뭔가. 무섭게 우르릉거리는 노견(怒犬)을 주의하라는 경고인가. 사실은 일본식 한자어인 ‘길 로자’ ‘어깨 견자’ 노견(路肩)이다. 갓길 ? 길가 ? 길섶(길 가장자리)등 훌륭한 우리말이 있는데도 그랬었다. 
  우리는 ‘아름답고 어휘가 풍부한 겨레말’ ‘세계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는 한글’을 크게 자랑은 하면서도,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거나 발전시켜 나가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때문에 넘쳐나는 게 외래어요, 모호한 한자투성이다.
  정부차원에서 우리말 순화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 된지는 40년 가까이 되고 있다. 1976년 정부는 ‘국어순화운동협의회’와 ‘국어심의회’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1980년에는 무려 1만2천여 개의 순화용어를 발표하였다. 국어를 순화하는 작업은 ‘우리말의 순수성을 유지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주체적 융성을 꾀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국어순화는 우리말에 섞여있는 잡(雜)된 요소들 즉,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운 한자어나 서양 외래어를, 될 수 있는 한 토박이말로 바꾸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오랜 기간 순화작업을 펼쳐 왔음에도, 실제 쓰임새는 여태껏 합격점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제주시내 버스정류장 곳곳에는 “감회운행됩니다”라는 조그만 안내 쪽지가 붙어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방학기간 시내버스가 감회운행됩니다”였다. 얼른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오호라 지긋지긋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때에 방학이 돼서, 감회가 새로워 운행을 하는구나.” 오죽 감회가 깊었으면 이렇게 안내문까지 부착하며 운행을 하겠다는 것인가.
  짐작하건대 여기에서의 감회는 ‘줄인다는 감(減)자’와 ‘횟수라는 회(回)자’인 모양이다. 왜 이렇게 군색한 용어를 굳이 써야 하는지. 이희승국어대사전에는 ‘감상과 회포’라는 의미의 감회(感懷)와 ‘한이 되어 뉘우친다’는 감회(憾悔)가 있을 뿐, 정류소의 그 ‘감회(減回)’는 없다.
  “죄송합니다만, 여름방학이 되어 이용객이 적은 관계로 ‘횟수를 줄여’ 운행하오니 양해바랍니다”로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줄임말도 정도껏 써야하는 것이다. 행정이 우선해야 할 과제중의 하나는 배려와 친절로 주민들에게 다가가는 일이다. 공공(公共)의 임무(任務)를 수행하는 공무원(公務員), 그들은 누구인가. 열심히 공부하고 성심을 다해 봉사하여야 한다.
         이    용   길(행정학박사 . 前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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