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당선이 지상 목표다. 자연히 유권자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과 공약을 고민하고 제시하게 된다. 재원 등 공약의 실현 가능성은 차후 문제다. 유권자의 관심을 끄는 게 우선이다.
시대가 변해 시민단체 등 민간부문이 커져 정책에 대한 검증이 강화되면서 허황된 약속 남발은 줄었으나 실효성 없는 선거 공약은 여전하다.
그런데 모든 선거 공약이 이행될 것으로 기대하는 유권자들도 많지 않다. 선거에 임해 정치인들이 발표하는 공약이 지닌 속성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선거공약 이행을 유권자의 힘으로 좌절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표공약이었던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여론에 밀려 좌초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선거 공약이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도 문제다. 당선 후 공약사항을 면밀히 검토해 추진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유권자에게 그 사정을 진솔하게 설명하며 이해를 구하는 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자세다. 미이행 시 반대파로부터 공격은 받겠지만 그것이 정도(正道)다.
최근 지역에서는 행정체제개편과 관련한 우근민 제주도지사의 선거 공약 내용을 놓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법인격 있는)기초자치단체 부활’을 공약했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제주도는 ‘제주형 특별자치’의 실현을 위해 행정시장 직선제를 약속했다고 반박하는 형국이다.
우 지사는 지난 지방선거 때 특별법 개정을 통한 기초자치단체 부활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구체적으로 기초자치단체장은 주민이 직접 선출하고, 기초의회는 도의회에 지역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기능을 맡기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지방자치법상의 법인격을 갖는 기초자치단체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기초자치단체 부활’은 ‘단체장 직선과 의회를 구성하는 것’이어서 우 지사 스스로 논란을 자초한 측면이 있다.
제주도행정체제개편위원회는 출범 2년3개월여 만인 지난달 29일 ‘행정시장 직선제’를 최종 대안으로 결정, 이를 제주도지사에게 건의했다.
우 지사는 이번에도 헷갈리는 결정을 했다. 행개위가 수년간 주민설명회, 토론회, 공청회 등을 거쳐 도출한 안에 대해 또 다시 도민의견 수렴 절차를 밟기로 한 것이다. 이를 두고 ‘공약에서 발을 빼기 위한 꼼수’, ‘밀어붙이기 위한 명분 찾기’ 등 해석이 분분하다.
그렇다면 행정시장 직선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 지사는 도내 주요 정당과 시민단체들이 일제히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들을 ‘반대를 위한 반대 세력’으로 봐서는 안 된다. 반대의 골자는 ‘기초자치단체 부활’이 아니면 추진하지 말라는 것이다. 행정시장 직선제의 경우 현행 제도의 문제점을 일부 개선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풀뿌리 민주주의 실현에는 한계가 있다. 도의원 증원이 없는 상태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직선 행정시장에 대한 견제도 문제다.
공약이니까 어떤 형태로든 이행하겠다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다. 만약 행정시장 직선제가 실현된다 해도 선거 때마다 기초자치단체 부활 공약이 나올 공산이 크다. 기초자치단체 부활에 대한 요구가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정체제 개편은 차기 도정의 과제로 넘기는 것도 한 방안이다. 옛말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그런 지혜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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