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글이 한문에 밀리고 있는 것을 손 놓고 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이나 얼을 나타내는 것은 한글이다. 한자로는 우리의 정신도, 문화도 담을 수 없다는 그다.
한곬 현병찬 서예가(73)를 두고 하는 얘기다. 23일 오후 '먹글이 있는 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가 서예에 관심을 둔 건 중학교 시절. 포스터들 속에 반듯하게 자리하고 있던 글씨를 보면서다.
그 후 아버지의 권유로 제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스승인 소암 현중화 선생과의 인연도 이때부터 시작한다.
"소암 현중화 선생님께서는 서예와 도덕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영광스럽게 제가 서예지도를 받게 됐습니다"
소암은 그에게 한자 서예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는 한자가 아닌 한글을 하고 싶었다.
소암의 제자 중에서 현재까지 한글 서예를 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선생님께 한글서예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는데,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2학년부터 한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나니 한글 서예를 사사할 만한 스승이 안 계셔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아 거의 십 년을 방황했습니다"
졸업 후 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는, 31살이 되던 해 문득 스승이 그리워져 소암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도 글을 쓰는지 묻자, 나이가 드니 글을 쓰기가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이 말에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신께서는 33세부터 서예를 시작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껴 다시 붓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서예를 시작했다. 1980년 후 부터는 해정 박태준에게서 서예를 배웠다.
44년간 교직에 몸담으며 수많은 학생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퇴임 후 그는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문화예술인마을에 입주했다. 그의 제자들은 이곳까지 쫓아와 그에게 서예를 배웠다.
그때 결심했다. 묵향을 느낄수 있는 곳을 만들겠다고. 그는 딱 10년전인 2003년 7월 ‘먹글이 있는 집’을 열었다.
"일에만 집중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곳까지 찾아와 저에게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절 찾아주는 제자들이 있어 고맙습니다"
그에게 '한글 서예'를 대중들에게 보급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한글 서예가 한문 서예보다 뒤처져 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글 서예가 경시되는 경향을 보고는 한글 서예의 발전에 일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며 “그러다 제주어로 된 주옥같은 제주속담과 노동요도 쓰게 돼 한글 서예에 더욱 매진하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제주사람에게는 제주사람들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말로 된 가훈을 집집마다 걸어놓을 수 있도록 ‘우리글 가훈’을 보급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요즘도 크고 작은 행사장에서 제자들과 함께 한글가훈 보급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는 '서예'가 젊은 층에서 잊히고 있어 우려된다고 했다.
"서예뿐만 아니라 전통예술분야가 등한시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새로운 문명이 계속 들어와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한글 서예의 맥을 이어가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는 "한글 서예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제주에서 기량을 펼 수 있는 제자들을 양성해 전국의 수준에 견줘 볼 수 있을 정도의 발전과 국전 초대작가까지 배출할 수 있었음은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며 "제자들이 제주민요쓰기, 제주속담쓰기, 한글가훈 보급에 매진하는 모습을 볼 때는 매우 자랑스럽습니다"고 소개했다.
앞으로 계획을 묻는 질문에 그는 "제자들과 함께 한글 서예 발전에 일조할 것입니다“라며 ” 제주에서 한글 서예, 제주말씨를 쓰는 한글서예보급에 정진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남은 땀을 쏟아 내겠습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