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애월읍 유수암리 홍윤애 묘에서, 의녀 홍윤애 추모 문학제를 제주문협, 정드리문협 주관으로 열렸다. 홍윤애 무덤은 외손녀와 나란히 고즈넉한 들에 성지처럼 잘 모셔져 있었다.
유월 장마였는지 잔뜩 흐린 날씨에 한두 방울 내리는 빗방울은 슬픔과 기쁨의 교차하는 느낌이 들었다. 의녀를 추모하기 위해 문협회원 및 애월읍 향리분들이 백여 명이 자리를 같이 했다. 세상에서 흔하고 말 많은 게 사랑 얘기다. 그러나 세상을 흔들어 놓고 만리장성을 쌓는 것은 남녀의 사랑이다.
홍윤애와 조정철의 진실한 사랑은 오직 제주에 여인 홍윤애 뿐이다. 고난과 상처와 분노를 희망과 용기로 육신과 혼까지 초개와 같이 온몸을 던져 조정철을 사랑한 논픽션(실화) 사랑이었기에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나 보다.
조정철은 조선 정조 일 년(1777), 모반에 연루돼 제주에 유배되어 왔다. 그는 27세부터 29년 동안 한 많은 세월을 유배 생활을 했다. 그의 집안은 삼대에 걸쳐 4명이 유배됐다.
그에 운명은 황해도 토산을 마지막으로 유배 생활을 하다 기적처럼 쉰일곱에 운명이 역전돼 복권과 동시에 제주목사를 자원했다. 형조 판서까지 승승장구하다 여든하나 나이로 돌아갔다.
홍윤애는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의 아가씨였다. 부모는 일찍 돌아갔다. 이웃에 귀양 온 조정철은 홍곡(鴻鵠)처럼 고결한 인품에 조용하고 신중한 처신으로 책을 보고, 시를 짓는 선비 중의 선비라는 걸 알았다. 그녀에게는 신비로운 인물로 비쳐져 심연 깊숙이 내재 되었을 것이다. 그에 반했는지 홍씨는 자청해서 조정철의 수발을 들게 되였다.
이때 제주에 온 목사 김시구는 조정철과 당파가 할아버지 때부터 원수였다. 그때부터 조정철은 고문과 박해를 받게 되였다. 어느 날 관아로 끌려가 심한 매를 맞고 거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 홍씨는 오줌을 부어 넣어 소생시켰다. 당시 법은 장사(杖死)하면 또다시 죽이는 일이 없었다. 김시구는 그녀를 관아로 끌어다가 임금과 조정의 중신들을 저주했고 유배인들과 서찰을 교환했다는 등 자백을 강요했다.
그리고 혹독한 고문과 달콤한 회유에도 홍씨는 차분하고 당찬 답변에 김시구는 이성과 체통을 잃고 윤노리나무 몽둥이로 매를 맞다 죽고 말았다. 홍씨가 죽고 제주에는 석 달 가까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그해 더위가 꺾일 무렵, 폭풍우가 밀어닥쳐 열흘 가까이 그치지 않았다. 섬사람들은 원통하게 죽은 홍씨가 귀신이 돼 김시구를 원망하는 한 서린 비를 퍼붓고 있다고 믿었다.
그후 제주목사가 된 조정철은 엄격한 조선에 사대부가 한 여인을 사랑하고 무덤을 찾아 통곡하고 추모비를 세운 예는 조선 땅에 유일하다. 추모시, 황천길 아득한데 누구를 의지해 돌아갔나/ 정의의 피 깊이 감추고 죽음 또한 까닭이 있었네/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 형도꽃처럼 빛나니/ 한집안의 높은 절개, 형제가 현숙하여라/ 젊은 나이의 두 무덤, 이제 일으키지 못하니/ 푸른 풀만이 말갈기 앞에 돋아나누나. <전문> 홍윤애의 묘는 전농로 한국토지주택공사 앞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그 자리에 제주 농업학교가 설립되면서 현 위치에 모셔져 있다. 의녀 홍윤애 추모제가 비명에 간 지 232주년이 되는 해에 뜻깊은 추모행사는 그에 권력의 부당함에 굴하지 않고 정의로운 기개로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열정과 순수함을 명복을 빌고, 제주 의녀의 표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뜻깊은 행사를 치렸다. 다시 한 번 제주문협(김순이), 정드리 문협(송인영)씨 노고에 감사드린다.
최창일 (시인, 제주세계자연유산 해설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