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와 ‘제주4·3’ -김관후
제노사이드와 ‘제주4·3’ -김관후
  • 제주매일
  • 승인 201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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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잊히지 않는다. 과거의 고통은 계속되고 지연된 정의는 부정된 정의이다. 산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 정의의 강은 반드시 자유롭게 흘러야 한다.” 존 베리(John Berry)의 말이다.

1948년 12월 9일 유엔총회는 <제조사이드 범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역>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국민· 인종· 민족· 종교집단을 전부 일부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한 행위”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제노사이드를 바탕으로 제주4·3을 바라볼 때 제기할 수 있는 쟁점은 무엇일까?

그런 점에서 제주4·3은 제노사이드라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국가 간에 발생한 학살도 아니고, 인종과 종교집단에 대한 학살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정치적 학살', 폴리티사이드(politicide)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이다. 파국과 번영이 함께 했다. 이중 파국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학살의 시대'라고 규정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전쟁과 학살 등으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이 세계적으로 6천만 명을 넘기 때문이다.

제노사이드란 '민족' 또는 '부족'을 뜻하는 그리스어 파생어 제노(geno)와 '살인'을 의미하는 로마어 'caedere'에서 파생한 '사이드(cide)가 결합된 복합어다. 이는 한 집단의 생물학적 구조를 파괴하는데 목적을 둔 행위로 연령과 성의 차이를 따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제주4·3은 해방 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가 미국적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후 제주도 사람들은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으며, 부모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어도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빨갱이의 후손이라는 굴레를 지고 숨죽여 살아야 했고, 때로는 연좌제를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반공주의자가 되기도 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문명사회의 기본원칙이 무시되었다. 특히 법을 지켜야 할 국가공권력이 법을 어기면서 민간인들을 살상하기도 했다. 토벌대가 재판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상한 점, 특히 어린이와 노인까지도 살해한 점은 중대한 인권유린이며 과오이다. 결론적으로 제주도는 냉전의 최대 희생지였다.

제주에서 학살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던 이데올로기는 ‘빨갱이’ 논리였다. 공산주의자는 위험한 사람이었지만 ‘빨갱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바로 이점에서 제주도민을 죽음으로 몰았던 빨갱이‘ 논리는 본질적으로 인종주의 감정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니까 제주4·3은 이승만 정권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실행에 옮긴 억업적 성격의 제노사이드였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계엄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제주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토벌대의 집단학살과 과잉진압이 7년 7개월 자행됐고 이는 보스니아, 르완다, 코소보, 킬링필드와 다르지 않다.

한국은 1951년 국가폭력에 의한 집단학살은 모두 처벌할 것으로 규정하는 제노사이드 협약 가입했다. 때문에 제주4·3의 완전한 진상규명은 이 협약에 따른 관련자 처벌이 전제돼야 한다. 그리고 제주4·3에 관여했던 당사자와 집단이 포함된 국가의 진정성 있는 사과와 4·3희생자에 대한 존중과 국가차원의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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