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6, 25-최창일
잊혀 가는 6, 25-최창일
  • 제주매일
  • 승인 201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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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6, 25 사변의 노래 가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불법 남침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3년간 지속한 전쟁이다. 북한군은 민족통일을 표방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민족의 분열과 대립으로 골은 더욱 고착화 시켰다. 올해가 6,25전쟁이 63주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정전협정 된 지 60주년이다. 그런데 북한은 3차 핵실험 이후 정전협정 백지화를 선언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고 있다. 필자는 60년대 등굣길에 또는 아침 조회시간에 모이라는 종소리가 울리면 6, 25 노래를 2절까지 불렀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러나 정부는 10년 동안 금지곡으로 설정 되었다. " 신 6, 25 노래" "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  이제나 그 제나 말 바꿈은 권력을 쥔 자의 권한이었던 것 같다. 고려가 그랬고, 조선이 그랬다. 오죽했으면 고려의 정체성을 없애려고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을까. 6, 25 때 북한군은 13만 5천여명에 탱크 242대, 폭격기 200여 대와 중 야포와 박격포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군대였다. 이에 반해 아군은 지상 병력 6만 5천여 명에 불과했다. 전쟁 때인 인한 피해는 우군이 전사 5만 8천여 명, 부상 1십7만 5천여 명, 행방불명 및 포로가 8만여 명이다. 연합군(미, 영, 터키) 전사 2만 9천여 명, 부상 1십만 4천여명이다. 이외 재산 및 정신적 가치관까지 천문학적 숫자로 큰 피해였다. 한반도가 지옥이 따로 없는 피로 물든 전쟁이다. 3 년이란 전쟁의 단기간에 이렇게 큰 피해는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 전쟁이다. 어떻게 보면 전쟁은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켰는지 모른다. 실크로드도 하나의 생사를 넘는 전쟁이고, 컬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도 전쟁이다. 원주민의 땅을 백인이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도 6, 25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는지 필자는 사유해보기도 한다. 우리 제주인은 4, 3사건으로 죽음의 고통을 헤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6, 25사변을 겪어야 했다. 정말로 그 시대 분들은 척박한 화산토 땅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살았다. 필자의 유년기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태어난 세대, 베이비 붐 세대의 초기였다. 초년기에 제주시 비행장에는 많은 미군이 주둔했었고, 간간이 일주도로에는 군용트럭이 모슬포 제1훈련소로 향하는 길에 군가를 부르면서 지나가면 필자는 친구들과 군용트럭과 군인들을 보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고사리 같은 두 손을 흔들면, 군인 아저씨는 건빵과 미제 깡통을 던져주면 받아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미제 커피 맛을 처음 느꼈던 같다. 지금도 간혹 그 향기에 젖을 데 있어 그 맛이 전장에 맛이 아닐까 하고 되묻기도 한다. 세월은 격세지감이라 할까. 필자는 조국의 干城이 되어 초임지가 철월의 백마고지 철책선이었다. 고지는 북한의 효성산(619고지)줄기인 395m이다. 중공군 3개 사단과 아군 1개 사단이 접전한 지역이다. 주인이 24차례나 바꿰고, 피아간 1만 7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고지를 빼앗기면 아군은 전술적으로 동두천까지 철수해야 했고, 북한으로는 철원평야를 확보 할 수 있는 전략적 가치 때문이다. 전쟁은 참혹한 것이다. 生死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내가 죽기로 살아  남기위해 먼저 보고 쏘아야 한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6, 25의 잔재를 볼 수 있었다. 교통호를 따라 미제 빈 깡통이 붉게 녹쓴 채 내 키만큼 쌓여, 백마고지 7~8부 능선을 따라 500m 나 깔렸고, 주위에는 부식된 소총과 포탄 등 수 종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적근산에서 DMZ 민경 수색중대장 임무를 수행했다. 북한과 아군 GP(경계소초)간의 거리는 300m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전쟁의 가장 치열했던 철의 삼각지대에 근무했다. 이는 철원, 김화, 평강을 일컫는 말이다. 벤플리트 장군이 명명한 곳이다. 평강 만이 북한 쪽에 있는 소읍 도시다. 그 옛적 경원선은 철원에서 원산과 금강산으로 가는 분기점이다. 금강산 가는 철로는 오성산(북한) 앞을 휘돌라 적근산 허리를 감싸고 지나가는 철로가 있다. 지금은 잔적(뚝)만 남아있어 지척에 둔 금강산이 적근산에서 아련하게 보일 뿐이다. 7080세대는 잊혀가는 6, 25를 생각이나 할까, 전쟁이 무엇인지 알기나 할까, 의문을 가져 보기도 한다. 그래서 후세에 전쟁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사마천이 말했듯이 "역사는 지나간 일을 기술하며 다가올 일을 생각하며 또한 天과 人間의 관계를 궁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하여 一家의 언어를 이루자 했다" 궁극적으로 평화와 자유는 국력이 상대국보다 위에 있어야만 존재 하는 것이다. 아아 어찌 잊으랴 그때 그 전쟁을.
-최창일 시인, 제주세계자연유산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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