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내버스 안에서의 일이다. 40대 초반 되어 보이는 여인이 초등학생 두 명을 데리고 차에 올랐다. 그런데 붐비는 사람들을 마구 헤치며 한 아이가 정류장에서 내리는 승객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형! 이리와 여기 자리가 있어 그러자 형이라 불리는 아이가 두더지처럼 사람 틈을 뚫고 나타났다. 허술한 70세 노인이 앉으려하는 자리에 엉덩이를 밀어내려 의자에 앉았다. 얼핏 보아도 교양이 있음직한 여인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좌석에 앉아 있으라고 큰소리로 말한다. 이 모습은 나만이 아닌 버스에 탄 승객들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부인과 아이들의 행동에 어이없는 쓴 웃음을 지으며 커가는 아이들의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만의 편의를 위해 이윤을 추구하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의구심을 품어본다. 어린 아이지만 분석하는 태도역시 예민하다. 이런 광경은 학교 교육의 부실함을 탓하고 부모들에게 또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사회의 의식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교육이란 원론적 이론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초등학생일지라도 이론적 주입에 추궁 당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통해 처세술의 귀납할 만큼 영리하다. 차안에 사람들이 복잡함을 느끼더라도 나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승객을 정확이 선택하고 기민한 눈치 감각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 따라서 생존 경쟁의 대열에서 이기는 기초 훈련에 부모는 그저 대견할 뿐이다. 노인이나 임산부의 좌석은 있으나 눈 딱 감고 고개를 숙이는 학생들은 양보라는 것은 없다. 따져 보면 구 교과서적인 원론적 이론이다. 예절이나 체면을 지키다가는 인생에서 낙오되기 십상이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이미 부모로부터 터득했다. 이런 현상은 시외버스도 마찬가지다. 시골 정류장 배차 시간 은 시내버스와 달리 거리의 간격은 더 길다. 장날이 되면 차안에 물건이 뒤범벅이 된다. 급기야 사람도 짐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된다. 차창 통로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길에 체이는 승객도 허다하다. 짐 보따리를 든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것이 나의 중심이고 나의 권리와 이익에 너무나 철저한 것이 오늘의 사회상이다. 우리 민족의 자랑인 인정이 어느 틈에 자취를 감추었다. 많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투박하게 살아온 시골 사람들이다. 그러나 도시적 교양을 익혀가며 학식을 쌓아온 본성적 인정은 이기(利己)의 무덤에 깊이 한탄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상에 대해 자신을 제외한 남의 탓으로만 돌리는 경향을 본다. 그러나 그 집단의 일원이며 기풍을 만드는 중요한 단어가 된다. 자기 자신만의 편안함과 집착함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의 고갈을 체험케 한다. 세상의 몰인정을 한탄 하면서도 바로 자신의 이를 창조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다. 모든 잘못을 나를 제외한 타인에게서만 잘못을 찾으려 든다. 이는 영원한 이기심이 더욱 발전되어 언젠가는 그것이 자기에게 희구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 않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기라는 결실을 거두게 되더라도 세상만을 탓하려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제주시 산림조합 이사 송 순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