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뜨린 장미-김찬집

2013-06-09     제주매일

6월은 장미의 달이라고 한다. 장미는 아름답다. 나는 가끔 스마트폰 앱으로 장미를 그린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만족할 때는 많지 않다. 늘 조금씩은 불만이다. 불만이기 때문에 망가뜨리고 또 편집한다. 만족해야 완성 단계이기 때문이다.불만은 만족보다 못하다. 모든 것을 행복과 불행이라는 개념으로 나눠 본다면 불만은 확실히 불행 쪽이고 만족은 행복 쪽이다. 그렇지만 오늘날까지 나를 있게 한 것은 만족보다는 불만 때문일 것이다. 배가 부르면 더 먹고 싶은 의욕이 사라진다. 진수성찬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처럼 만족은 의욕의 종점을 의미한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그렇지만 불만족이면 만족할 때까지 해봐야 한다. 그래서 의욕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만은 고마운 것이다. 불만은 끊임없이 나를 달리게 하고 살아서 꿈틀거리게 하는 원동력이다.오늘 그려본 분홍장미는 어느 정도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마음에 든다는 것은 만족이다.그런데 조금 마음에 드는 색과 형태가 나오자 한 군데를 망가뜨리고 싶어 졌다. 만족에 안주하지 못하는 습성 때문이다. 그래서 망가뜨리긴 했지만 아주 조금만 그래봤다. 꽃잎의 중심부를 좀 점잖지 못한 형태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망가뜨려도 장미라고 할까? 장미가 아니면 어떠랴! 불만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계속 만족한 장미를 그리고 싶어지고 비록 포토샵이지만 그림능력은 향상될 터이니까,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루어지지 않아야 완성되는 사랑이 있다. 그 연인은 멀리서 보아야 더 아름답고 완벽하지 못해야 영원한 것이다. 미완의 사랑을 간직하려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이 영원하기 위해 장미꽃을 망가뜨리며 완성과 미완성의 사랑을 시(詩)적인 사랑으로 승화 시킨다. 시는 사랑의 완성되지 못한 텃밭에서 탄생된다.
시는 항상 부족한 면을 채워 주려는 몸부림이고, 부족하고 어둡더라도 눈물겹게 밝음을 기다리는 미완성의 그늘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나는 김소월의 “산유화”시를 좋아 한다. 학생시절에는 남들이 모두 소월의 시들을 좋아하듯이 나도 그냥 그렇게 좋아하고 “산유화”를 노래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도 고독의 의미와 함께 도시서민으로 살아 온 내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준다. 나는 이 시를  통해서 가끔 소월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한다.“산유화”에 나타나는 산유화<미나리의 일종>는 소월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는 산 속에 홀로 피어 있는 산유화처럼 그렇게 쓸쓸하게 살다 갔다. 자료에 따르면 중앙문단 속에 어울리지도 못한 채 그렇게 저만치 구석에서 피어 있는 꽃이었고 죽기 전에는 별로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한 외로운 시인이었다. 다만 그렇게 쓸쓸하고 보잘 것 없는 시인이었어도 그런 시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삶의 청량제였다.
소월시인은  ‘산에서 우는 작은 새’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작은 새는 자신처럼 시골에서 식민지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서민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배경을 떠나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이만큼 극명하게 인간의 참된 존재양식을 그려 준시는 없다.
시는 인간학이며 사회학이다. 그 내부에는 철학과 역사가 마치 인체의 구석구석을 흐르고 있는 피처럼 살아 움직여야 독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소월 시인도 삶에서 인간의 참된 존재양식을 극명하게 그리기위해 얼마나 많은 장미꽃을 망가뜨리며 울었을까? 그래서 어둡고 천박한 땅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가 함축한 산유화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변방 구석에서 부른 외로운 울음이었는지도 모른다.장미꽃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교만, 자부, 오만 등에서, 부(富)와 권력으로 우리인간적인 인연을 서슴없이 내팽개치는 현상을 자주 보는 우리들이다.
 장미꽃을 망가뜨리면서  끊임없이 나를 달리게 하고 살아서 꿈틀거리게 하는 망가뜨린 장미꽃은 나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해본다.

 김찬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