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의 발달과 정보전달 방식의 진화(박원철)

2013-03-27     제주매일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서로간의 의사전달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개발해왔다. 원시시대를 거쳐 집단을 이루어 살기 시작하면서 의사전달 방법들은 더욱 발전했다.
 지금처럼 통신시설의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도 급한 소식을 알거나 알리려면 상당한 시일과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적의 침입 등 급한 소식을 전하고자 할때에는 봉수대(烽燧臺)와 파발(擺撥)을 이용했다. 옛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봉수대는 외적의 침입이나 큰일이 나면 상황을 주변 또는 조정에 신속하게 알리는 통신수단이었다.
봉(烽)은 밤에 올리는 횃불의 신호이고, 수(燧)는 낮에 올리는 신호수단 이었다.
신호방식도 5단계로 구분해 올리면서 주변에 정보를 빠르게 전달했다. 관리도 엄격해서 주변에 경계 표주를 세우거나 거짓으로 봉화나 방화를 올리면 사형에 처하고, 주변에 잡신이나 제사도 일체 금했다.
그러나 봉수제(烽燧制)도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자 1583년(선조 16년)부터 사람이 뛰어서 전달하는 보발(步撥)이 실시되다가, 1592년 말을 타고 전달하는 기발(騎撥)이 설치되었다. 파발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것은 인조때에 서발·북발·남발의 3대로(大路)를 근간으로 한 파발제가 시행되었다. 또한 북벌론이 대두된 효종 때에는 청나라에 대한 경계가 강화되어 전국적인 파발제가 완성되었다.
파발은 기발과 보발로 나누어졌다. 기발은 보통 25리마다 중간연락소격인 참(站)을 두었으며 기발에는 발장(撥將) 1명, 색리(色吏) 1명, 기발군(騎撥軍) 5명과 말 5필을 배치했다. 보발은 30리마다 1참을 두고, 참에는 발장 1명, 군정 2명을 배치하여 인원과 말을 교체하여 빠르게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
 파발은 이전의 봉수제와 비교해볼 때 오히려 전달속도가 느리고 경비가 많이 드는 단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씨의 영향을 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문서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보안이 유지되고 자세한 보고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파발제는 조선 후기까지 역참, 봉수제와 더불어 조선시대 군사통신체제의 핵심을 이루었으나 조선말 고종때에 전화와 전신체제가 도입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21세기는 변해도 너무많이 변했다. “말”에서 “문자”의 발명, “전화”와 “팩시밀리”의 발명을 넘어 전 세계인의 실시간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 “인터넷”, 그리고 이 모든 정보를 휴대해준 휴대폰까지... 원시사회를 거쳐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사회로의 변화는 수천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산업화사회에서 정보화사회는 200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정보화사회는 수년동안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발전속도는 가속도가 붙어서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정보의 흐름은 정보 공급자가 수요자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해 주는것 이었지만, 이제는 양방향 소통이 가능한 스마트TV 등장과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웹서핑, SNS, 게임등 다양한 정보로 인하여 정보가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역으로 지나친 정보로 개인정보 누출로 인한 사생활의 침해와 소화해낼 수 없는 방대한 정보로 인하여 정보소외 계층까지도 생겨나고 있다. 
전화기가 발명된지 140여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전자.통신기기라는 문명이 이기 덕분에 정보를 기다리는 시대는 끝이나고, 스마트폰 가입자가 지난해 말 현재 3,000만명을 넘어서면서 지구 건너편 소식부터 아프리카 오지 소식까지 음성과 문자, 동영상까지 무엇이든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정보정책과 정보통신담당 박원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