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묵 한 꼬지의 사색-공옥자

2013-02-27     제주매일

   한 겨울 추위가 영하를 오르내리던 날이었다.
설 명절을 앞둔 재래시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어머, 장 다보셨어요?”
환한 미소와 함께 건너온 인사말이 정겨웠다. 다가서며 그녀는
“무얼 사드릴까요?” 했다.
 기다린 듯 대답이 순간에 나갔다.
“ 응, 어묵 하나.”
 길가에 솥을 걸어놓고 어묵을 팔고 있었다. 군침이 돌았다. 주머니를 뒤졌으나 잔돈이 잡히지 않아 포기하고 지나치던 참이었다.
 놀란 눈을 크게 뜬 그녀가 어묵장사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어묵 통에서 따끈한 어묵 한 꼬지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으려다말고 미안한 맘에
“자네는?” 하고 묻자.
‘점심 먹은 지가 얼마 안 돼, 배가 부르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녀 말을 믿기로 하고 염치 좋게 어묵을 삼켰다. ‘더 드세요’ 권했지만 ‘하나면 족하다’고, ‘사실은 나도 배가 고팠던 건 아니라고,’ 구차한 변명을 하며 싱겁게 헤어지고 나서 내 돌발적인 행동을 곰곰 반추했다. 절친한 사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허물없는 친지도 아닌 터에 대목 장터에서 만난 사람에게 불쑥 어묵을 사내라 했으니 ‘노망 끼가 들었다 해도 할 말 이 없겠어.’ 허허 웃음이 나왔다. 나이 들면 어린애 된다는 말이 맞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에 대한 신뢰에다 얼마간의 장난 끼와, 뭔가 해주고 싶어 안달하듯 보이는 그녀 마음이 손에 잡혀 그 뜻을 받아주고 싶었었다. 어묵 한 꼬지 오백 원이라 크게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라서 쉽게 말이 나왔을 것이다. 사실은 추운 날씨에 뜨끈한 어묵이 날 유혹했다는 게 적절한 이유였을 테지만.
 크게 허물치는 않으리라 하면서도 내내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사람들은 만나면 서로 친밀감을 나타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반가워하다가도 돌아서면 들었던 말이나 보여준 행동을 비판하고 말거리를 삼기가 십상이다. 좋은 분위기에서 맞장구치며 했던 이야기들이 뒤틀려서 흉이 되고 상처가 되는 걸 더러 보았다. 남들은 나를 평하고 나는 또 남들을 평하며 사는 게 세상이다. 변함없이 서로 우호적인 감정이 유지 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아무렇지 않은 사람을 심하게 적의를 가지고 말하는 상대라도 만나면 덩달아 험담에 참여자가 되기도 해서 우리 모두는 가해자이며 피해자이다. 오직하면 세치의 혀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겠는가.
  전 세기에,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쓴 『나와 너』라는 명저에는 미묘한 인간관계의 흐름을 잘 짚어 주고 있었다. 오래 전에 읽어 다 재생할 수 없는데도 유독 기억에 남는 몇 장이 떠오른다. 사람이 <나와 너> 라는 이인칭 관계에서는 목적격이 되어 존중되지만 <나와 그>인 삼인칭에서는 수단화 된다고 했던 말이다. 그는 역사 속 인물 중에서 이 두 유형의 대표 주자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설파했는데  모든 사람을 이인칭 ‘너’로서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주변의 모든 인물을 삼인칭 화하여 수단으로 이용한 나폴레옹을 거명했었다. 다시 말하자면 내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 조건 없이 하는 사랑은 이인칭 대상이고 참된 사랑이라는 뜻이다. 한 사람이 삶에서 목적으로 존재하면 그 곳에 필연적인 사랑이 놓인다. 나는 너를 위해서 헌신하리라는 고귀한 설정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인칭 적 사랑의 대상을 확산해가는 일이 숭고한 삶으로의 여정이 되는 것이다. 쉽게 떠올리게 되는 성자나 현자들은 이 길을 걸으며 생애를 바쳤던 분들이다.
 약탈과 전쟁, 착취와 살상이 판을 치던 어두운 인류사의 방향을 조금씩 변화시켜 인간의 의식을 진화시켜온 기적은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여 사랑한 분들의 공적이다.
 하지만 사회생활이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누군가의 수단이 되고 누군가는 내 인생의 수단이 되어 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듯하다. 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삼인칭으로 수단화 된다는 그의 지적은  옳아 보인다.
 사람을 상대할 때 아무나에게
“당신이야 말로 내 인생의 목적이오.”
하기는 어려울 뿐 아니라 오히려 ‘저 사람에게서 무얼 얻어낼까’ 머리를 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거창한 담론에 이르지 않더라도 갑남을녀의 대화 속에서조차 삼인칭이 등장하면 진실로 공정한 말을 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화자인 나 혹은 너, 듣는 너 혹은 나 사이에서 삼인칭은 도마 위의 고기신세가 되기 일쑤인 까닭이다. 남을 깎아내리면서 기회만 되면 자신의 우월감을 즐기고 싶은 인간의 본성은 그만큼 강렬해 보인다.

 일상에 매몰되어 사는 보통사람들에게 전 인류를 이인칭으로 사랑하신 성자의 본을 따라 살라는 주문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에 가까울 터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을 없는 자리에서 화제로 삼을 때, 그가 들어도 괜찮은 말만이라도 할 수 있을까.
 올해는 이 어려운 과제를 얼마나 행할 수 있을지 스스로 지켜보고 싶어졌다.

 젊은 그대여, 정이 담뿍 서린 어묵 고마웠네.
자네의 제안을 선 듯  받았던 까닭은 그 짧은 순간에  자네의 눈빛에서 순수한 사랑을 읽어 낸 까닭이었네. 이인칭 사랑엔 기쁨이 날개를 편다네, 

   공 옥자